지난달 18일 타결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서 우리 정부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양보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해도 실질적으로 수입을 중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다 검역과정에서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이 발견돼도 전수검사를 실시할 권한 마저 포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 광우병 발생시 안전장치 전무 = 수입위생조건 합의문에 따르면 미국에서 광우별이 발생해도 국제수역사무국(OIE)이 미국의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하향 조정하지 않는 한 우리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중단할 방법은 없다.
광우병 발생시 OIE의 판정이 나올 때까지 소요되는 기간이 최소 4~5개월인 점을 감안하면 그 기간 동안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가 아무런 제약 없이 국내로 들어올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는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을 앞두고 OIE보다 강한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장담했던 정부의 당초 입장과 크게 다른 내용이다.
종전에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우리 정부는 즉각 수입 중단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도 수출을 중단해야 했다.
정부가 이번 수입위생조건을 타결하면서 대폭 양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 측 요구를 거부할 과학적 근거를 축적하지 못한 데다 한미정상회담을 협상 데드라인으로 정하는 바람에 협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 검역주권 후퇴…개방폭은 되레 확대 = 미국산 쇠고기에서 SRM이 발견될 경우 우리 정부는 검사비율(샘플)을 늘릴 수 있지만 전수검사를 실시할 수는 없다. 또 5회 이상 검사를 통과하면 검사비율을 다시 낮춰야 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전체 도축소의 0.5%만 광우병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광우병 의심환자가 발생할 경우 일본산 도축소에 대한 전수검사를 실시한다.
생후 30개월 미만 소에 대해서는 SRM 인정 부위를 2개로 축소한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존에는 7개 부위를 SRM 인정 부위로 규정했었다.
일본에서 전수검사를 실시한 결과 생후 20~30개월 된 소에서도 광우병이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돼 30개월 미만의 소는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에 찬물을 끼얹은 바 있다.
이밖에도 수입위생조건은 발효 후 180일이 지나면 등뼈(T-bone)의 연령구분 표시 의무가 자동 폐지되는 내용도 담고 있다.
한미 양국은 이에 대해 협의할 수 있지만 미국이 연령구분 표시에 동의하지 않으면 우리 정부로서는 마땅히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 재협상 가능성은? =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이 우리 측에 크게 불리한 내용으로 타결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는 재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통상전문가들은 수입위생조건이 국회 동의 절차가 필요 없는 장관고시 사안이기 때문에 재협상을 벌이는 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발효 예정일인 오는 15일 이전에 재협상을 시작해야 하는 제약이 있다.
정부는 재협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한미 FTA 비준과 맞물려 있는데다 OIE가 미국에 부여한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박탈하지 않는 한 재협상을 요구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합민주당 등 야당들은 성난 민심을 등에 업고 특별법 제정을 통해서라도 정부가 재협상에 나서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미국과 합의한 수입위생조건보다 상위 법을 제정해 생후 30개월 이상된 쇠고기를 수입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재호 기자 gggtttppp@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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