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10일 대한민국 서울.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홍재형 전 부총리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홍 전 부총리는 "각하, 아무래도 IMF의 지원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라면서 "잘못하면 국가 부도가 날 수 있습니다"라고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악을 금치 못했음은 물론이다.
2008년 9월 18일 미국 워싱턴. 미국 재무부 수장과 의회 고위 관계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크리스토퍼 도드 상원 금융위원장,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 등 의회 지도자들에게 "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안을 마련하지 않을 경우 미국 경제는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민태성 금융부 차장 |
2008년 3월 뉴욕. 월가는 충격의 도가니속으로 빠져들었다. 한때 미국 2위 증권사로써 채권사업부문의 강자로 군림했고 대표 투자은행 '빅5' 중 한 곳이었던 베어스턴스가 JP모건체이스로 헐값에 넘어간 것이다.
충격은 이어졌다. 10개 이상의 중소은행들이 문을 닫았다. 마침내 9월에는 158년 역사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을 선언하며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얼마 있지 않아 메릴린치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품안으로 들어갔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시장발 신용위기 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7000억달러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 경제가 부도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딱 10년전 한국의 모습이다.
정부가 벼랑끝으로 몰리면서 사실상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는 사실도 비슷하다. 정부 입장에서 금융기관들의 모럴헤저드를 이끌 수 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붓는 것은 마지막 보루를 담보로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는 것이고 미국은 자체적으로 구제금융을 마련했다는 정도다.
IMF 사태 당시 한국은 자산관리공사를 통해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부었고 미국은 지난 1989년 저축대부조합 파산 당시 공적자금 투입 기구 역할을 했던 정리신탁공사(RTC)와 유사한 부실채권 매입기구 설립을 준비 중이다.
신용위기 사태를 불러온 미국 기업인들의 행태도 10년전 한국과 판박이다.
1997년 재계 14위 한보그룹은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한보는 5조원 규모의 당진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18개 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하는 등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은 한보그룹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없이 대출을 진행했고 은행감독원 등 금융감독기관 또한 동일인 여신한도를 넘어선 한보철강에 대한 제일은행의 편법 지원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결과는 정태수 당시 한보그룹 총회장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한보 사태가 한국경제에 미친 여파는 실로 충격 그 자체였다.
미국 월가 역시 연방수사국(FBI)이 신용위기 사태의 주범이랄 수 있는 4개 주요 금융기관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초저금리 시대라는 이불을 덮고 부동산시장에 대한 적절한 평가 없이 무분별한 대출을 일삼은 것이 신용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가운데 패니매와 프레디맥 등 양대 국책모기지업체, 리먼브라더스, AIG 등 4개 금융회사들의 사기혐의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IMF 위기와 월가의 신용위기를 직접 비교하는 것에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기업이 앞뒤 가리지 않고 이익만 추구하는 경영을 일삼은 것과 이를 방관한 규제 당국이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미국 신용위기와 10년전 한국의 IMF 사태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이 IMF의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IMF를 통해 구제금융을 받는 것과 미국이 자체적으로 구제금융안을 조성하는 것 역시 실질적으로 큰 차이도 없다.
미국이 IMF 사태를 맞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 리더를 자처하며 외환위기 당시 IMF를 앞세워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의 구조조정을 종용하고 큰 소리를 떵떵 치던 미국의 당당함은 과연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민태성 기자 tsmi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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