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신용위기 사태가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통과가 기정사실화됐던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구제금융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된 것이다.
미 하원은 29일(현지시간) 금융위기 해결을 위해 정부가 상정한 구제금융법안을 부결시켰다.
전일 양당 지도부와 행정부가 금융구제안에 합의함에 따라 이날 본회의에서 관련 법안을 상정시켜 표결에 부쳤지만 찬성 205표, 반대 228표로 과반수 동의에 실패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보도했다.
사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왼쪽)과 램 에마뉴엘 민주당 코커스 의장이 구제금융법안 부결 직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
공화당의 반대가 컸다. 공화당 의원 65명이 찬성표를 던졌고 3분의2가 넘는 133명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민주당 소속 의원은 140명이 찬성했으나 95명은 반대했다.
이날 표결은 전자투표 방식으로 진행돼 당초 15분 내외에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양당 지도부가 반대표를 던진 소속 의원들을 설득하는 등 시간을 끄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믿고 있었던 구제금융법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가장 큰 충격에 휩싸인 곳은 역시 금융시장이었다.
미국증시에서 다우지수는 이날 800포인트에 가까운 낙폭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폭으로 하락했고 S&P500지수 역시 100포인트가 넘게 빠지며 지난 1987년 '블랙먼데이' 이후 최악의 장세를 연출했다.
기술주 위주의 나스닥은 9%가 넘게 하락해 지수 2000선이 붕괴됐다. 이날 하루 미국증시에서 사라진 돈만 1조2000억달러(약 1400조원)에 달했다.
PNC 웰스 매니지먼트의 제임스 듀니간 투자 담당 책임자는 "시장의 신뢰감이 무너지고 있다"면서 "부엌에 불이 나면 누구라도 집에 있을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환시장에 달러는 엔화 대비 급락세를 연출했다. 구제금융 법안 부결로 증시가 폭락하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의 청산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작용한 까닭이다.
이날 달러/엔 환율은 전일 대비 1.6% 하락한 104.27엔을 기록했다. 장중에는 1.9%로 낙폭을 키우기도 했다.
상품시장 역시 출렁였다. 국제 유가가 10달러 이상 폭락했다.
미국 정부의 7000억달러 구제금융법안 부결로 금융위기가 악화되고 이로 인해 원유 수요가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가를 끌어내렸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된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11월물 인도분 가격은 전일대비 배럴당 10.52달러(9.8%) 떨어진 96.37달러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미국 경제의 침체가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면서 유가의 추가 하락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MF 글로벌의 존 길더프 애널리스트는 "현재 경제 전망은 어둡다"면서 "금융위기가 유럽을 집어 삼키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 역시 수요가 지속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위기가 악화되면서 유가가 세자릿수 밑으로 계속해서 빠질 수 있다"고 말해 국제유가 당분간 100달러를 넘지 못할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사진: 29일 구제금융법안 부결 직후 증시가 폭락하자 뉴욕증권거래소 트레이더들이 시세판을 쳐다보고 있다. |
한편 이날 법안 부결로 퇴임을 4개월여 앞둔 부시 대통령은 물론 공화·민주 양당 지도부의 리더십에 대한 불신도 확산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 후보와 존 매케인 후보가 최근 구제금융 법안의 통과를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서 두 후보 모두 당선되더라도 차기 국정 운영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특히 공화당의 경우 여당임에도 불구하고 법안 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당 지도부의 지도력에 대한 한계 논란이 일고 있다는 지적이다.
구제금융법안이 부결된 직후 기자회견을 가진 공화당의 마이크 펜스 의원은 "구제금융법안을 국민이 반대했다"면서 "의회 역시 거부했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의 바니 프랭크 하원 금융위원장은 "오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라면서 "공화당이 구제금융법안을 무산시켰다"고 강조했다.
하원은 이날 부결된 구제금융법안의 수정안에 대해 내달 2일 이후 재표결을 가질 예정으로 빠르면 이번 주 후반 다시 수정된 구제금융법안이 의회에서 다뤄질 것으로 보이지만 의회가 뜻을 모으지 못할 경우 장기간에 걸쳐 법안이 표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민태성 기자 tsmi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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