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은행에서 근무하는 이 모(42)씨는 1년 전 홍콩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던 두 자녀를 다시 불러들이기로 했다. 하반기 들어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면서 매달 송금해야 할 생활비가 늘어난 것도 부담이지만 자녀들의 조기 귀국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은행권 구조조정 움직임 때문에 자신의 거취에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씨는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퇴직금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생각도 해봤지만 최근 경기가 급속히 위축되고 있어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9월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진 후 은행권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는 비난 여론이 쏟아지면서 마음 고생을 했던 은행원들이 최근에는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감으로 떨고 있다.
기업들의 부실이 채권은행으로 전이돼 은행권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 지난 1998년 외환위기 당시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일선 지점에서 부지점장을 맡고 있는 40대 은행원 곽 모씨는 "외환위기 때가 자꾸 생각나 불안하다"며 "은행권 구조조정이 아직 표면화하지는 않았지만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이 망하면서 은행들이 빨려 들어갔던 상황이 재연되고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은행권은 재무건전성과 수익성이 동반 하락하면서 인건비 절감을 위해 희망퇴직을 늘리고 있다. 정부가 유동성 지원의 대가로 지점 통폐합 등 강도 높은 자구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인원 감축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은행권의 희망퇴직은 매년 있어 왔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규모가 훨씬 클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먼저 희망퇴직을 실시한 SC제일은행의 경우 190여 명이 회사를 떠났으며 한국씨티은행도 희망퇴직으로 130명 가량을 감원할 계획이다.
우리은행 영업점 직원인 이 모(38)씨는 "영업점 통폐합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희망퇴직까지 실시되자 영업점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있다"며 "지금부터라도 앞으로 뭘 해야할 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최근 은행들이 위기를 겪고 있어 외환위기 때 은행을 떠났던 선배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며 "당시 나는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불안하기만 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은행들은 회망퇴직 외에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은행원들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채수웅 신한은행 홍보팀장은 "지난 10월23일 발표한 영업점 통폐합 방안은 인력을 재배치한다는 의미"라며 "조직 통폐합과 구조조정은 별개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주병 전국금융노조신한지부 홍보부장도 "지난달 인사 담당 부행장으로부터 구조조정 계획이 없다는 확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은행에서 여신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직원은 "사측에서 구조조정은 없다고 안심시키고 있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어쩔 수 없이 인원 감축에 나설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내년에는 은행들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 영업점 직원인 한 모(29)씨는 "경기침체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구조조정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의구심을 보였다.
농협은 정규직 총 정원을 동결하기로 한 가운데 올해 150여 명의 신입행원을 뽑았다. 새로 뽑은 인원만큼 기존 인력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인력 재배치 과정에서 반발하는 직원들을 중심으로 명예퇴직을 권고할 방침이다. 이미 회사 차원의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기업은행 고위 관계자는 "시중은행들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지면서 이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검토되고 있다"며 "구조조정을 언급하는 것은 시기상조이지만 사정이 지금보다 더욱 나빠지면 구조조정도 하나의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유경 기자 ykki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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