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함 속 토끼”
이 말은 <25시>의 작가 콘스탄트 비루질 게오르규(Constant Virgil Gheorghiu)가 시인(詩人)을 가리켜 한 말이다. 1916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게오르규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의 승무원으로 참전했다. 잠수함 가장 밑 부분에는 토끼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공기에 민감했던 토끼가 맑은 공기가 탁한 공기로 변하는 미묘한 경계선을 인간보다 빨리 감지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 토끼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잠수함에서 일종의 ‘경고등’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게오르규는 시인이란 토끼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읽어내는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통해 현실세계를 향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현실세계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21세기형 ‘토끼’는 지금도 곳곳에 존재한다. 국가 경제의 허리를 지탱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웬만한 공단은 사실상 폐허로 변한지 오래고, 자금줄마저 끊겨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중소기업들의 체감경기가 사실상 침몰해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일부 기업들은 상장을 추진하다가 사업에 제동이 걸리거나 공급계약이 취소되면서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낙인찍히는 사례도 빈번해 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 발발 직후였던 1998년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국내기업의 신용등급이 하향 추세로 돌아섰다고 한다.
한국신용평가가 27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등급변동성향(Rating Drift)은 -3.53%로, 1998년 -51.92% 이후 10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기업의 신용위험이 증가한 것이다.
지난 명절, 우연히 국내 자동차 회사의 하청업체 직원을 만났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일감이 없어서 공장 규모도 줄이고, 주 5일 근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일이 없어서 지난달 40명을 내보냈고, 지금은 100여명 가량만 남았다고 한다. 그마저도 일감이 없어서 주중에도 오후 3시면 하루 일과를 끝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시급 4000원을 받는 비정규직인 이 사람은 일을 한 만큼 돈을 받기 때문에 자신으로서는 손해를 감수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일마저 없으면 길바닥에 나 앉을 판이라 어쩔 수 없노라고.
이야기가 자동차 노조의 파업에 가 닿았다. 할 말이 많았던지, 그는 “그 사람들은 정규직이라서 일을 안 해도 돈이 나오지만, 우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무거운 마음을 억눌렀다.
곧바로 말을 이은 그는 “중소기업은 물론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황인데, 제 배를 채우자고 파업을 하겠다는 건 도대체 누굴 위한 건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공기가 탁해지는 순간이었다.
김훈기 기자 bo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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