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경찰이 범죄 용의자에게 수갑을 채울 때 의무적으로 되뇌는 묵비권, 변호사선임권에 대한 통보가 있다.
이는 '미란다 원칙'이라고 해서 190년대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에 의해 확립된 원칙이며 범죄인이라 하더라도 경찰은 그가 일련의 형사소송상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통보해야 하는 의무를 의미한다.
인권보호의 큰 줄기를 확립한 미란다 원칙은 40년 넘게 그 법적 구속력을 유지함에 따라 이제는 하나의 일반 영어 단어로 인식되지만 사실은 어네스트 미란다(Ernesto a. Miranda)라는 성폭행범의 이름이다.
1963년 3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시 경찰은 당시 21세였던 멕시코계 미국인 어네스토 미란다를 납치·강간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서로 연행된 미란다는 피해자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되었고,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2명의 경찰관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미란다는 처음에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약 2시간가량의 신문 과정 후 범행을 인정하는 구두 자백과 범행자백자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자 미란다는 자백을 번복하고, 진술서를 증거로 인정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과정에서 변호사가 체포과정의 불법성을 논하고,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백을 받은 것 등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연방대법원은 1966년, 5대 4의 표결로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유는 그가 진술거부권, 변호인선임권 등의 권리를 고지(告知)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피조사업체 권리를 보장하고 조사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2월부터 피조사업체에게 공정거래법상 '미란다 원칙'을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꾸준히 이뤄진 기업친화적 위원회 활동의 한 일환으로 그동안 공정위 직권조사가 조사자 위주로 장기간 진행되는 등 피조사업체 부담을 가중시키는 사례가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규제 당국과 규제 대상 사이에는 항상 시비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사가 과도하고 규제가 지나치다는 게 흔히 규제 대상 쪽에서 나오는 목소리인 반면 규제 당국은 정반대 주장을 말하기 마련이다.
공정위 조사가 좀 지나친 게 아니냐는 제보는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물론 조사대상자 쪽 주장만으론 실상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난해 공정위 국감에서 △공정위 조사공문에 종료기간 불특정 △조사 대상의 종류 및 범위 무제한 △조사 혐의 미고지 등이 현장조사의 제도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던 걸 생각하면 공정위 조사 행태와 관련한 기업 불만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듯하다.
이번 미란다 원칙 적용으로 인해 공정위가 사전에 고지해야 할 기업의 권리에 특별히 변한 것은 없다. 하지만 강제조사권이 없어 현장조사에 한계를 지니고 있는 공정위 조사관들로서는 당장 업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볼멘 소리가 높다.
하지만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그동안 공정위가 '경제 검찰'이라 불리며 기업들에 군림하고 사사건건 기업 활동을 가로막았던 이미지에서 탈피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기업에 지나친 부담이 가지 않도록 함으로써 조사대상 기업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안 그러면 그저 허울 좋은 껍데기 변화라는 비판을 자초할 수 있다.
새 정부가 줄곧 '친 기업'을 부르짖고 있는 가운데서도 홀로 '친 시장 정책'을 지향한다는 경제검찰 공정위가 이번 '미란다 원칙' 도입으로 이미지 쇄신에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영백 기자 inche@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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