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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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03-1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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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희(이화여대 명예교수-학술원 회원)

몇 년 전 필자가 들은 얘기다. 국내 굴지의 모 음대에서 기악과 신임교수 몇 분을 채용하던 때의 일이다. 물론 공개채용의 절차를 거쳐서 엄격히 선발할 방침이 정해 졌다.

신문에 공고가 나갔고 예상대로 많은 지원자가 서류를 제출했다. 보통관례에 따른다면 그 대학의 기존 교수들 중에서 인사위원들을 선출하여 이들을 심사, 최적임자를 선정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 되었다. 음악계의 고질적인 줄서기, 제자 챙기기, 학맥, 인맥 등 복잡한 역학관계 때문에 대학 내에서 인사위원회 자체가 구성이 안 되는 것이었다.

또 구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선정된 사람이 교수회의에서 인준을 받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대학 학장이 용단을 내렸다.

경비를 좀 쓰더라도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의 대가들을 초빙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발하도록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자기들끼리 자율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외국인 들에게 판정을 맡긴 것이다. 이를테면 ‘히딩크식’ 선발방식을 쓴 것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어느 조직체이건 구성원 간의 신뢰가 깨지면 경영의 흐름은 결국 ‘제로섬 게임’으로 가게 마련이다. 서로가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느라 상대방을 얽어 매는 일에 치중한다.

이렇게 되면 각종 네거티브 전술이 판을 치게 되며 결국 모두의 체통과 권위가 무너지게 된다.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요즘의 혼란이 바로 이러한 신뢰의 붕괴 현상에서 비롯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즉 미디어 개혁법을 놓고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다가 결국 논의를 ‘사회적 논의기구’에 떠 넘기는 결정을 내렸다.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의회는 여론수렴의 최종점이다. 의회자체가 심의기구이면서 의회에서 통과여부를 결정하기가 힘들다 하여 어떤 다른 기구에게 심의를 위탁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다.

국회의원들끼리 얼마나 서로를 믿지 못했으면 이런 편법을 쓰게 되었을까. 신뢰의 붕괴로 인한 권위의 추락이다.

사법부에서도 신뢰가 붕괴됨으로써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법원장이 소속 판사들에게 ‘어른으로서’ 의사표시 한 것을 두고 이를 직권을 남용한 부당한 압력이라고 대드는 분위기다. 대법원장까지도 이에 연루되었다 하여 후배 판사들 앞에서 심사를 받아야 할 판이다. 젊은 판사들이 선배들을 얼마나 믿지 못했으면 ‘질서’가 중시되어야 하는 사법부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을까.

요즘 대학신입생 선발 방식으로 몇몇 대학에서 입학사정관제도를 채택했다고 하여 화제다. 대학 행정의 신뢰가 실추된 결과다. 명분은 잠재력이 큰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대학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긴 셈이다. 대학사회의 신뢰가 무너짐으로 인하여 발생한 권위의 추락현상이다.

붕괴된 신뢰는 하루아침에 복원되지 않는다. 복원의 과정은 복잡하고 또 길다.

무릇 신뢰복원은 주체들간의 끊임없는 대화와 의견 교환이 있어야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소규모 과제를 놓고 실제로 상호간에 믿어보는 것이 신뢰복원에 도움이 된다.

우리 국회의 경우 실천 가능한 몇 개의 작은 법안부터 정상적으로 통과시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법부의 경우도 상하간에 오랫동안 있어 왔던 불편한 질서 중 아주 작은 것부터 걷어 내는 데에서 신뢰구축을 시작해 볼 일이다.

대학 사회에서도 기존의 학생선발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각종 자료를 통해 증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모든 권위가 실종되고 사회질서는 붕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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