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가지는 풍요는 무궁무진하다. 흔히 근사한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보는 동안의 ‘시각적 만족’에 그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연초록 청포도가 알알이 박힌 한 폭의 정물화는 그 자체로 시원해 보이는 시각적 정취와 싱그러운 향취, 새콤달콤한 미각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최근 활용도가 높아진 첨단 디지털 장치는 보는 이들의 오감을 더욱 만족시키고 있다. 관람객의 음파를 반영해 색상과 파장을 다양하게 연출하는 비디오 아트, 조명과 음악이 어우러져 관람객이 앉은 의자에 따라 다른 음색을 띄는 참여형 설치작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보이지 않는 음색을 형상화하다.
그림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조용한 갤러리에는 잔잔한 음악이 배경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림과 음악의 유쾌한 동거’ 전에서는 바하의 음악과 오페라의 유령 OST가 하이엔드오디오를 통해 전시장 가운데서부터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진다. 오디오 양 옆으로는 유대균의 조각상 ‘바하’가 정면을 응시하고 섰다.
이순형의 ‘구스타프말러에의 연상’이라는 목조 작품은 피아노 건반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듯 이채로운 색상으로 표현,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는 시선을 끌어 모은다.
오현금 토포하우스 대표는 “색의 요정 음악의 요정과 함께 행복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는 말로 기획의도를 표현했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신 오감도’ 전 속의 작품들은 은유적이면서 허구적인 가상의 이미지를 ‘감각의 환영’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재탄생시킨다.
우제길은 ‘리듬’이라는 유채화를 통해 음의 강약과 장단을 표현했다. 실로폰을 연상 시키는 밝고 어두운 금속성 막대들은 음의 높낮이와 길이를 명쾌하게 형상화한다.
김병호의 ‘300개의 조용한 꽃가루’는 대형 알루미늄 파이프를 다발로 엮어 관람하는 이들의 소리를 변형해 메아리처럼 되돌려준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신(新) 오감도’전은 6월 7일까지 1층 전시실에서 상시 개설된다.
향과 색과 소리는 서로를 부르며 대답한다.
작품을 바라보며 소리를 듣고 향기를 느끼는 과정은 하나 이상의 감각들이 시각을 통해서 직접적이고 복합적으로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이다.
전가영 작가의 ‘악보 극장’은 언뜻 보기에 극장 속의 대형 화면을 연상시킨다. 관객들은 대여섯 개 마련돼 있는 의자에 자유자재로 앉을 수 있다. 무대 앞에 설치된 발광다이오드(LED)를 통해서는 각개의 의자와 연결된 소리와 화면이 관객이 앉는 의자에 따라 변형돼 나타난다.
안성하의 ‘무제’에서는 그림 속 화병에 들어있는 사탕들의 달콤한 향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윤병락의 ‘여름향기-탐스러운 상자’와 이용학의 ‘풍요’에서는 철마다 알알이 굵어져가는 과실의 향기뿐 아니라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과육의 탐스러움이 살아난다.
얽혀진 다중의 감각들은 일대일의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 상호관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그림과 음악의 유쾌한 동거’전은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이달 말까지 열린다.
정진희 기자 snowway@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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