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용 부국장겸 금융부장 |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사례는 많다. 위기상황은 절차상의 느긋함을 용인하지 않고 이론적 논리보단 상황적 논리가 앞서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외환위기 상황이 대표적이다. 당시 국가 부도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대명제 앞에서 합리적 절차는 철없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다. 기억하기론, 이때 내수 부양을 위해 해묵은 민간기업들의 숙제들이 일거에 해결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건설업계의 분양가 자율화다. 이때 풀린 분양가 규제는 지금 3.3제곱미터당 평균1000만원 시대를 연 단초가 됐다.
4월 임시국회의 쟁점으로 떠오른 한은법 개정안의 핵심은 한은이 자료제출 요구와 조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현재로선 통과될 확율이 커 보이지만-감독권한 행사의 밑바탕인 조사권이 정부에서 한은으로 넘어가게 되는 셈이다.
한은으로선 10여 년 만의 반격이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빼앗긴 감독.조사권을 되찾기 위한 분위기는 무르익은 상황이다. 지난해 하반기에 불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가 허술한 국내 금융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뭔가 바꿔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했다.
이만하면 절치부심해왔던 한은으로선 법개정을 통해 은행에 대한 감독.조사권을 틀어쥘 절호의 찬스다. 필자도 한은의 입장을 일정 부분 이해한다. 정책금융을 지원하는 입장에서 은행에 대한 조사는 물론 감독권을 가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 또 지금처럼 비상금융 상황에선 중앙은행의 역할이 크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제한하는 현재의 한은법으론 한계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현재도 한은이 은행에 대해 조사권과 자료제출 요구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은행 관계자는 "현재도 공동조사를 나와서 자료를 가져가고 있다. 연구목적이든 어떤 형태로도 금감원보다 더 자료를 가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 입장에선 한국은행이 어떤 자료를 요구하든 간에 제출을 거부한 적이 없고 또 거부할 입장도 아니라는 얘기다.
은행은 금감원과 한국은행의 공동조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금감원과 한은이 은행에서 제출한 자료를 공조하면 될 일이란게 은행권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은행들은 금융 정책당국간의 헤게모니 싸움에 은행들의 업무부담만 늘어나게 됐다고 여긴다.
은행 입장에선 고래싸움(금감원-한은)에 새우등(은행) 터지는 꼴이란 불만이 깊다. 공동조사든, 단독조사든 한번 나서면 열흘 정도를 그 업무에만 매달려야 하는 은행 입장을 헤아리면 이해가 간다. "제출 서류 양식을 표준화하거나 통일시키서 금감원과 한은이 자료를 공유하면 되는게 아니냐"는 순진(?)한 은행 관계자의 말이 되레 안쓰럽다.
금융계 일각에선 한은의 현 상황을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규정한다. 물론 일각에서 나오는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우스갯소리가 시장에서 설득력을 얻기 시작할 때엔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의 권위는 더더욱 '사고무친'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
필자는 한은법개정 논란을 지켜보면서 MB정부가 만들어 놓은 이상한(?) 금융시스템에 대한 재편 논의가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중앙은행에 감독.조사권을 부여하느냐 마느냐는 사실 지엽적인 문제다.
지난해 말 불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으로 부각된 현재의 금융시스템 중 한은법 개정 골자는 일부에 불과하다.
한은법 개정안이 어떤 결론을 낼지는 두고 볼일이다. 하지만 차제에 복잡하고 헷갈리게 얽히고 설킨 금융시스템을 바로 세우기 바란다. 무엇이 제대로 된 금융정책 감독 시스템인지는 이미 가닥이 잡혔다. 이 일에도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기민함이 발휘되길 기대한다.
윤경용 부국장 겸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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