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말을 기점으로 800조원을 넘어선 단기유동성은 현재 자산시장과 실물부문의 괴리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고 있다.
서민과 중소기업 등 실물부문 구석구석으로 온기가 퍼지지 않는 가운데 경기회복 기대에 따른 핫머니(단기자금)만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형태의 단기유동성이 시장교란 요인으로 작용하고 향후 자산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실물부문에 타격을 주지 않는 가운데 자산 거품을 최소화할 수 있는 미시 대응책을 구상 중이다.
◇ 금융위기 이후 단기유동성 92조원 폭증
18일 기획재정부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에 따르면 정부 당국이 공식집계하고 있는 단기유동성 규모는 4월말 기준으로 811조3천억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800조원 선을 넘어섰다.
금융위기 직전인 9월 말에 단기유동성이 719조5천억원이었음을 감안하면 91조8천억원이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는 747조9천억원으로 올해 들어서만 63조4천억원의 부동자금이 생성됐다.
이는 올해 들어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데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통상 단기유동성은 실세요구불예금.수시입출금식예금.6개월미만 정기예금.양도성예금증서(CD).환매조건부채권(RP).머니마켓펀드(MMF).6개월미만 은행신탁.종금사의 발행어음과 종합자산관리계좌(CMA).증권사 고객예탁금 등을 포함한다.
단기유동성이 과잉상태가 되면 자금이 실물경제로 흐르지 않고 부동산이나 주식시장에서 투기자금으로 활용돼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된다.
한국은행의 금융시장동향 자료를 보면 실세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예금은 4월 기준으로 지난해 말 대비 8.5%, 10.1% 늘어났다.
이에 비해 증권사 고객예탁금은 55.4%, 자산운용사의 머니마켓펀드(MMF)는 34.8% 급증했다.
3월 예금은행의 정기예금 회전율이 0.4회로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85년 이후 가장 높았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정기예금 회전율은 예금 지급액을 예금 평잔액으로 나눈 수치로, 회전율이 높다는 것은 예금 인출이 그만큼 빈번했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정기예금을 깨서 수시입출금예금이나 요구불예금, MMF로 자금을 옮기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최근 불어나는 단기부동자금의 상당 부분이 투자 대기성 자금일 수 있다"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학습이 된 중산층들이 경기가 바닥을 확인한 것이 아니냐는 신호가 나오면서 주식.부동산 시장으로 투자를 서두르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단기유동성 '거품 형성 우려'
단기 유동성이 폭증하는 것은 현재 돈을 굴릴 투자처를 찾는 돈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저축자들이 투자처를 찾으려고 관망하고 기업들이 불확실한 경제상황에 대비해 현금 또는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일부 자금은 주식과 부동산시장으로 들어가 과열을 만들어내고 있다.
당초 정부는 극심한 경기침체를 맞아 금리를 낮춰 돈을 풀고 유동성을 풍부히 한 뒤 실물부문에 투입해 조기에 경제 회복을 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한국은행은 지속적으로 금리를 낮추고 정부 또한 금융기관을 통해 기업에 대한 유동성 공급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경기침체 국면이 여전한데도 주식과 일부 지역 부동산 등 자산가격만 나홀로 급등하면서 과잉유동성이 문제로 떠오르게 됐다.
물론 이는 경기회복의 기대감을 반영하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지만 또 다른 거품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부작용이 우려된다.
실제 4월 한 달간 코스피 지수 상승률은 11%로 미국의 5.2%, 영국의 7.3%에 비해 강한 흐름을 보였으며, 부동산 시장도 강남 3구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규제완화에 대한 기대감이 형성되면서 급등하는 추세다.
결국 정부가 단기 유동성 문제를 방임한 상태에서 향후 경기 급락세가 진정될 경우 부동산 가격 폭등 등 자산시장 과열 그리고 인플레이션으로 한국 경제가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 당국, 유동성 조기 흡수도 검토
기본적으로 정부는 민간부문이 자생적인 활력을 찾을 때까지 확장적 정책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경제위기가 신용경색에서 출발한 만큼 정부는 금리를 낮춰 시중에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해왔으며 아직 경기 회복을 확신할 만큼 곳곳으로 자금이 풀리지 않았다는 판단이다.
폭증하는 단기유동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긴 했지만 '과잉'이라는 꼬리표를 달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자산시장과 실물부문의 괴리가 커진 데 따른 것이다. 실물부문에선 경기회복을 단언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자산시장은 과열로 치닫게 되면서 향후 경제운용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정부는 겉으론 태연한 듯 보이지만 머릿속은 다소 복잡하다. 실물 구석구석으로 자금이 퍼져 나가도록 하되 자산시장으로 과도하게 유입되는 자금은 통제해야 한다는 복합적인 명제에 직면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정부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통화정책보다는 미시적인 접근법을 떠올리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는 지역의 경우 추가적으로 투기지역 지정을 검토해볼 수 있다.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부동산 시장으로 가는 자금을 차단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
이런 카드와 더불어 경기회복에 앞서 은행채 매입 등 비전형적 통화를 회수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시중자금이 정부가 원하는 쪽으로만 가도록 디자인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자산시장에 흘러간 자금이 결국은 위축된 소비나 투자를 풀리게 해 경기를 선순환 궤도에 올릴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다.
상황이 이렇게 복잡해지자 KDI는 경기회복이 확인되기 전에 유동성을 흡수해야 한다고 권고하기도 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결국 유동성이 자산시장으로 과도하게 흘러가 거품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투자 부문으로 가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매우 섬세한 조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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