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학벌·독재·지역주의에 맞서며 최고 자리까지 올라
퇴임 후 뇌물죄 검찰 소환 도덕성 타격 스스로 삶 선택
‘풍운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풍을 뚫고 비주류, 서민 편에서 살다가 바람처럼 운명을 달리했다. 상업고등학교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은 독학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독재정권과 맞섰다. 최고 권력자 대통령 자리에서도 그는 유례없이 탄핵소추를 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역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가난, 학벌, 독재, 지역주의 등 성역과 금기에 맞서 고군분투했으며 드라마틱한 승리의 역사를 아로새기곤 했다. ‘혁명의 바람’ 같은 역사의 주체였다.
◆빈농에 자식에서 ‘인권변호사’로 우뚝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아버지 노판석(사망)씨와 어머니 이순례(사망)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학비가 없어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한 후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부산, 울산 등지에서 막노동을 했다. 고향에 돌아와 고시공부에 들어간 노 전 대통령은 같은 고향출신 권양숙 여사와 1973년 결혼했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지만 7개월 만에 그만두고 78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조세소송을 주로 맡아 ‘승률 90%’를 자랑하던 노 전 대통령은 1981년 대학생 20여명이 사회과학서적을 읽은 혐의로 기소된 시국사건인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학생과 노동자 등이 연루된 사건을 도맡았던 그는 서민과 함께 암울한 독재정권과 맞서면서 투쟁의 전사로 활약했다.
◆5공 청문회 스타 정치인의 도전과 좌절
노 전 대통령은 바람처럼 1988년 13대 총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천으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에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출발은 좋았다. 그는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며 ‘청문회 스타’로 부각됐다. 1990년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가 1992년 총선 실패, 19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1996년 서울 종로 패배라는 시련을 겪는다. 그는 계속된 패배로 정치권의 야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역주의에 온몸으로 맞선 노 전 대통령에게 기회는 찾아왔다.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했을 때다. 당시 민주당 잔류파와 함께 결성한 국민통합추진회의가 ‘3김 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 후보 지지 등으로 의견이 갈릴 때 “시대의 과제는 정권교체”라고 주장했다. 이어 1998년 7월 종로 보궐선거에서 6년 만에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다.
◆‘노풍’ 타고 최고권좌 ‘참여 대통령’으로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발탁도 노 전 대통령에겐 대권 도전의 주춧돌이 됐다. 행정력과 조직적 리더십을 갖출 기회였다.
서민 이미지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그의 노력은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얻으면서 2002년 국민참여 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극복하고 마침내 여당 대선후보자리를 차지한다.
노 전 대통령은 ‘노사모’ 등 팬클럽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마침내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었다.
또 재임기간 내내 한나라당과 사학법,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놓고 대치하면서 ‘충돌’과 ‘도전’의 과정을 밟았다.
◆파란만장한 삶, 비극적 최후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본인 뜻대로 고향인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돌아가 서민의 삶을 누린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그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정점에 그가 놓이게 됐다. ‘포괄적 뇌물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조사까지 받게 된다. 수사선상은 권 여사를 비롯, 아들 건호씨, 딸 정연씨에게까지 미쳤다. 노 전 대통령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 집어들만큼 괴로운 심경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남달리 강했던 노 전 대통령에게 마지막 자산 ‘도덕성’이 무너진 것은 큰 좌절이었다. 질곡의 삶을 버텨왔던 ‘방패’였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결국 박 회장으로부터 불법자금 수수 의혹 사건을 영원한 미제의 사건으로 남긴 채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에 몸을 내던졌다.
송정훈 기자 songhdd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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