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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젝션피(Rejection Fee=탈락보상금)란 클라이언트(의뢰인)가 여러 제안사로부터 프리젠테이션(제안)을 받은 후, 그들 중 한 회사만 선택하고 나머지 탈락한 제안사에 지불하는 일정한 보상금을 말한다. 이를 번역한 적당한 우리말이 없어 업계마다 각각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데, 디자인 업계에서는 ‘시안비’라는 말로 많이 통용되고 있다.
요즘과 같이 수요자보다 공급자가 훨씬 많은 상황에서는 경쟁 프리젠테이션이 필수적인데,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제안을 받아 수준높은 디자인 회사를 선택도 하고 질좋은 아이디어를 구할 수도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 방법을 선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쟁 프리젠테이션 방법은 일반 기업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용역 사업에도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왔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모든 용역사업은 기획재정부가 정한 ‘협상에 의한 계약체결 기준’이라는 규정을 기반으로, 기술제안서 및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평가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를 통해 협상적격업체를 선정하게 된다.
공공기관이 실시하는 경쟁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업체들은 사활을 걸고 경쟁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업체들의 노력은 가히 처절할 정도이고,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일반적으로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업체들은 짧게는 1~2주일, 길게는 수개월에 걸쳐 제안서 작성 및 디자인 시안 제작에 매달리게 되는데, 여기에 지출되는 ‘인건비’와 웬만한 소설책 두께의 제안서 제작을 위한 ‘인쇄비’, 그리고 규정에 따라 직접 제출해야 하는 각종 증빙서류와 보증보험료 등의 ‘기타 경비’들만 해도 실로 엄청나다.
그러나 경쟁 입찰의 결과를 보면 1순위의 협상적격업체 만이 승리의 면류관을 쓸 뿐, 경쟁에 참여했던 1순위 이외의 모든 업체들의 노력과 아이디어는 한 순간 쓸모없는 종잇장에 불과해진다. 특히 근소한 차이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하는 2순위나 3순위 업체의 허탈감은 경제적 손실 이상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클라이언트가 ‘갑’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제안사로부터 양질의 제안을 공짜로 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토와 이러한 상황을 방어할 수도 없는 제도적 약점으로 인해 2순위, 3순위의 업체들은 밤새워 기획하고 디자인한 엄연한 창작물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내주어야 하는 그야말로 ‘업체를 두 번 죽이는’ 입장이 된다. 이는 지식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업체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이쯤 되면 경쟁 입찰에 참여하는 것이 업체로서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로 치부하며 위안 삼을 정도가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될 수도 있다. 참여하자니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고, 참여하지 않자니 그러다간 기회조차 없어 회사를 접어야 할 판이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공정하고 효율적인 업체 선정을 위해 경쟁입찰 방식을 택하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1순위 업체만 혜택을 입고, 2순위 이하의 탈락 업체는 그동안 들인 노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조차 받을 수 없는 잘못된 관행을 제도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이미 일반 기업이나 광고업계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인지해왔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리젝션피’ 제도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은 경쟁 참여업체에 대한 당연한 에티켓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 및 공공기관 용역의 경우, 건축설계분야에서만 시행하고 있는 행정안전부 예규의 ‘설계서 작성비 보상’ 정도가 고작인 것을 보면 정부의 인식 변화는 아직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리젝션피’는 경쟁입찰에 참여한 업체에 대한 에티켓을 넘어 기획과 창작의 결과물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인정받아야 하며, 이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을 위해 정부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모든 지식서비스 산업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국가적 성장동력산업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리젝션피’에 대한 규정이 반드시 삽입될 수 있도록 관계부처인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 담당 공무원의 노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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