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피카소 화가 ‘자블론’ 의 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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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09-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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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러시아 4대 미술관 트레차코프에 작품 전시한 우즈벡 최고 화가</b>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화가 자블론
"생이 마감될 때 붓과 물감은 쥐고 가겠다"

우즈베키스탄은 국가적으로 다른 서방 세계와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는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예술 분야 특히 미술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창작에 대한 화가들의 혼과 열정이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중심 우즈베키스탄에서 피카소와 같은 위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노령의 화가 자블론은 이렇게 말했다.

“돈과 명예는 어느 순간에 가질수 있지만 작품은 화가가 이 세상과 이별해도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이 후세의 사람들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 줄 수 있는 작품을 위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나의 붓 끝에 나의 혼을 담을 것입니다”

우즈베키스탄 국보급 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우마르베코브 자블론(63세)화가는 첫 인상에서 범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였을까? 외모에서 풍기는 기품과 화려한 언변은 그가 왜? 우즈베키스탄을 넘어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인지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가 처음 그림을 그리며 화가라는 인생의 직업으로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은 1965년인 19살 때 우즈베키스탄 화가 칼리지에 다니면서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1966년에 칼리지를 졸업하고 소련 국립 모스크바 대학 영화부 소속 미술과에서 6년의 기간동안 재학하면서 소련내 각종 미술 전시회에 참여하며 수준높은 작품들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정교한 기법(miniature)을 사용하는 동양화에 심취하면서 부터였다. 그의 작품중에 ‘색깔의 힘’ ‘천재들의 모습’ 은 러시아에서 배웠던 기풍과는 전혀 다르게 현실이 아닌 상상을 통해 그린 것으로 동양화의 뿌리를 두고 있다.

묘한 인연이었을까? 그의 외모는 미국에 가면 미국 사람, 일본에 가면 일본 사람, 아랍에 가면 아랍인으로 착각할 만큼 변화무쌍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그가 국제적인 화가로서 지명도를 높이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그가 미술 인생중 가장 감격적인 시기는 1984년 구, 소련 당시 화가협회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러시아 4대 미술관중 하나인 트레차코프 미술관 (The State Tretyakov Gallery)에 그의 그림이 영구히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자블론에 따르면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가에 1856년 개관한 트레차코프 미술관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으로 11세기 이후의 러시아 미술가들 위주로 5만점의 회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이곳에는 러시아 미술뿐 아니라 전 비잔티 미술을 통틀어 보물중의 보물이라 할수 있는 블라디미르의 ‘성모’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삼위일체’ , 슬리코프의 ‘공작 모로조프’ 페로프의 ‘도스도예프스키’ 등 불후의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생에 마지막 꿈은 불후의 명작 그려 유명 경매에 출품 하는 것=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유서깊은 명소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미술가로서 평생 잊지못할 영광으로 그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어 화가로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된 그는 그 여세를 몰아 1985년~95년까지 2번에 걸쳐 우즈베키스탄 국회의원을 역임하게 된다.

그러나 창작을 통해 한폭의 작품이 그려지는 화가인 그에게 국회의원은 짐이 될 뿐이었다. 그는 10년간의 정치 활동을 하면서도 붓을 놓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화가와 정치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끝내 정치에서 은퇴하고 외국에서 전시회를 갖는데 열중했다.

자블론이 화가로서 처음 외국에서 개인 박람회를 연 것은 1975년~89년까지 알제리를 시작으로 해마다 2년 간극으로 서독 뒤셀도르프, 핀란드 헬싱키, 2차례에 걸쳐 왕이 관람한 쿠웨이트와 일본, 그리고 미국 워싱턴, 뉴욕, 필라델피아, 마이애미 등 이었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터키 이스탄블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다고 회고 했다.

   
 
  (사진설명) 자블론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 '청소년의 꿈'
그는 지난 2008년 10월 이후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잠시 위축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터키, 두바이, 일본으로부터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올 10월에 계획되어 있는 해외 전시회에 몰두하기위해 외부 활동을 신중히 자제하고 있다.         

자블론은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궁에도 자신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정작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라는 지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세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크리스티, 또는 소더비와 같은 국제적인 경매시장에는 이름을 올리지는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에대해 자블론은 “우즈베키스탄은 천재에 가까운 화가들이 많지만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 않을뿐이라며, 바로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업적이 혁신적인 장르를 도입(innovator)하고 그것이 우즈베키스탄에서만 할 수 있는 고유 기법으로 세계인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을 그려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경매시장에서 진정한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자블론은 한국에 대해 우즈베키스탄은 오랜기간 남한 사람들로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구, 소련으로부터 분리 독립 한 이후 대우자동차가 들어오면서 사업가들의 발길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자원개발을 위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고려인이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 교류와 같은 문화 왕래는 여전히 부진하다며, 자신도 올 5월에 한국에서 어떤 갤러리를 통해 개인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미국발 금융위기로 무산됐지만 여전히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고 언제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을 방문해서 전통을 사랑하는 한국민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즈벡 화가이면서 동양의 심오함에 흠뻑 빠진 63세의 노령 화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붓과 물감이며, 죽을때도 한손에는 붓을 쥐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을 후세에 기억되는 화가이기를 위해 최근 신화속에 나오는 그림이지만 평생 찾지 못한 그림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 그림을 찾는 날 자신의 꿈은 이루어진 것이고 이를 자신에게 주어진 신에게 감사하며, 그 림이 세상에 영원히 기억되는 그림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타슈켄트=아주경제) 최귀영기자 ckygood21@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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