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수의 돋보기세상) 영중추부사와 사외이사

조선시대 중추부는 세조 12년 1466년 고려시대 때 만든 중추원을 개편한 기구다. 중추원은 고려조 때 국가기밀과 왕명출납을 담당한 핵심부서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명목상 무관의 최고관부라는 명칭만 달았지, 소관사무가 없는 유명무실 기구였다. 국가에 공이 있는 퇴직한 문무관 고위관료들의 예우인 듯 보인다. 이중 서열에 높은 자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삼아 이들이 죽을 때까지 녹봉을 받게 했다. 대개 이 자리에 오르면, 국가원로로써 대접을 받았다 한다.
 
조선 성종 때  영중추부사 김국광(1415~1480)은 부친에 이어 재상에 오른 세조의 근신(近臣)이다. 세조는 김국광의 일처리가 치밀하고 사리에 밝음을 아꼈다 한다.  세조는 그의 암련(暗鍊,모든 사물에 정통하다)을 칭찬하여 '사지제일(事知第一)'라는 글자를 내릴 정도였다.

성종 1년(1470) 김국광이 좌의정에 있을 때였다. 김국광은 비리사건에 연루돼 탄핵을 받았다. 김국광이 병조판서 재직시 축재한 것이 화근이 돼 이에 연루된 동생과 사위가 뇌물죄로 처벌받았던 것이다. 이후 대간들은 김국광을 탄핵했지만 성종은 그때마다 모른척했다. 당시 사간은 김국광을 가르켜,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자였다'고 실록에 적었다. 

성종 8년(1477년) 영중추부사로 임명된 김국광은 다음해 우의정으로 재기했다. 그러나 과거 비리사건에 연루된 그를 입조시킬 수 없다는 대간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죽자 승정원은 관례대로 부의(賻儀)를 청했으나 그의 죄상을 낱낱이 알게 된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뜻이 있되 뜻을 펴지 못했다'는 치욕적인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아들이 여러 번 글을 고칠 것을 청했다.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사후 처벌한 셈이다. 그의 불행은 아들에까지 미쳤다. 김국광의 아들 김극괴는 연산군 때 비리사건에 연루돼 삭직됐다가 본처 소생 아들을 첩과 공모살인해 삼천리 유배형을 당했다.

최근 퇴직 관료들이 대기업의 사외이사나 고문으로 영입되는 등 기업과 줄을 대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0년 대법관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가 2005년 대법원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임명 당시 그는 변호사 시절 삼성재판의 초기 변론을 맡은 전력이 있어 논란이 일었다. 최근 삼성재판 판결이 났음에도 사법부가 무력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삼성재판 판결에서 이 대법원장과 삼성과의 짧은 인연이 이번 판결의 ‘옥에티’라는 지적 때문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대형 로펌의 고문을 지내다가 장관으로 발탁됐다. 정건용 산은총재도 대기업 사외이사가 됐다. 국세청장 후보 물망에 올랐던 한 인사도 한 대기업의 현직 사외이사였다.  금융기관 최고경영자의 30%가 전직 관료 출신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들을 감시해야할 정부가 이들 상대로 공정한 시각으로 감시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현직 관료들의 퇴직 이후 코스가 대기업의 사외이사나 고문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시대다. 그들만 탓할 것도 아니다. 다만 퇴직관료들의 사회참여가 평생 일구었던 공적인 영역에서 비껴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박용수 기자 pe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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