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원 (엑스포디자인브랜딩 대표)
건물을 뒤덮은 상점간판들이 ‘시각공해’를 초래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최근 대한민국 전역에 ‘간판디자인 정비’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각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간판디자인 정비사업’은 난립되어 있는 옥외광고물을 개선하여 쾌적하고 아름다운 거리, 찾고 싶은 거리를 조성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이 사업은 크고 현란한 간판의 건물들로 대변되는 국내 도시의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고, 재활용이 불가능한 기존의 플렉스(flex = 옥외광고용 유연성 원단) 간판을 교체하며, LED등과 같은 새로운 조명소재의 사용으로 에너지 효율까지도 높일 수 있어서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는 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게다가 정부가 추진하는 ‘녹색성장’의 기조와도 일맥상통 하다보니, 각 지자체로서는 너도나도 이 사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에 정비가 진행된 거리들을 지나다 보면, 한층 정돈되고 깔끔해진 이미지를 느낄 수 있으며, 몇몇 지역은 간판정비 후 상권이 더욱 활성화 되었다는 긍정적인 얘기까지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토록 좋은 취지를 배경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새로운 문제점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바로 범인은 ‘또 하나의 획일화’에 있다. 종전에는 각 상점들이 너도나도 더 큰 간판, 더 튀는 색을 찾다 보니 너무 혼란스러운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이를 좀더 규격화시킨다는 차원에서 ‘통일성’과 ‘정돈된 이미지’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각 상점의 개성과 특성을 살리지 못한 채 같은 컬러, 같은 서체의 사용으로 천편일률적이 되어버린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모순된 사업체계에 있다. 간판디자인 정비사업은 보통 특정 거리 또는 특정 마을 단위로 범위를 지정하여 발주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대부분 현장조사에서부터 간판주(상인)들의 의견수렴, 디자인, 설계, 제작 및 설치까지가 프로젝트의 범주에 해당되며, 크게는 ‘디자인’과 ‘제작•시공’의 두 전문분야가 협력 진행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언뜻 보면 두 전문분야의 공동수급을 통한 협업으로 ‘One-stop Service’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한 개의 프로젝트에 책정되는 예산은 1~2억 정도가 고작이며, 이 금액은 간판의 원재료 및 시공에 들어가는 인건비 등 절대비용을 충당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이다. 따라서 간판 시공업체들은 수익을 맞추기 위해 자체적으로 품질이 낮은 디자인을 양산해 내거나, 아주 적은 금액으로 디자인업체에게 하도급을 주는 형태로 사업을 진행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들이 앞서 언급한 부작용들을 새롭게 등장시킨 핵심 주범인 것이다.
간판디자인 정비사업은 다른 프로젝트와 비교하여 몇 배 더 심도 있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70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는 거리에 대한 디자인 정비사업이라고 한다면, 이는 70명의 클라이언트를 대상으로 70가지의 디자인을 개성 있게 개발해야 하는 대규모의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다. 그만큼 많은 인력과 비용이 투입되어야 하며, 간판주 한 명 한 명을 설득하는 노력과 시간, 전문 디자이너의 체계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양질의 디자인’과 ‘양질의 제작•시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이 두 가지 분야의 분리 발주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예산 또한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합리적 예산이 전제된 분리 발주 제도를 통해 발주처는 두 가지 분야가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성공적인 프로젝트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독려하고, 수행하는 기업 역시 서로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자 하기 보다는, 각자 더 좋은 품질로 인정받도록 노력하게 만들어야 한다.
향후 더 많은 지자체에서 시행하게 될 ‘간판디자인 정비사업’이, 정작 ‘디자인’이 배제된 상태에서 ‘간판 정비사업’ 일변도로만 전개된다면 이는 알맹이가 빠진 ‘속 빈 강정’으로 또 다른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다.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이 ‘시각공해’의 고통을 또 한번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보기 싫다고 해서 무조건 뜯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어떻게 새롭게 채워갈 것인가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간판디자인 정비사업’은 말 그대로 ‘디자인’이 중심이 된 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모두의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사업임을 다시 한번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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