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로 세부 일정이 지연돼 아직 의미 있는 변화를 체감하긴 어렵다. 금융업권간 장벽을 허물고 규제를 풀어 세계 금융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겠다던 당초 취지도 많이 무색해진 게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금융위기로 충격에 휩싸였던 자본시장이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경제는 유재수 금융위원회 자본시장과장, 이광수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장, 백명현 금융투자협회 상무, 이상빈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와 함께 우리 자본시장이 해결해야 할 과제와 나아갈 방향을 짚어봤다. [편집자주]
-자본시장법 세부 일정이 지연되면서 업계에선 불만이 나오고 있다. 금융위기 재발 가능성을 낮추면서도 자본시장법 본래 취지를 살릴 방안은.
◆유재수 금융위원회 자본시장과장=자본시장법 제정 취지가 실제 영업현장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런 효과가 조기에 나타날 수 있도록 업계 역시 경쟁을 통한 대형화, 전문인력 양성, 투자자 보호를 위한 내부통제 시스템 강화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정부는 자본시장법이 의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추가적인 제도개선과 효율적 감독으로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이광수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장=자본시장법은 금융투자업자가 고객 예탁금에 대한 자금이체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은행권과 금융투자업자 사이에 갈등이 커졌다. 금융영역간 다툼은 우리 자본시장이 선진화로 가는 길에 발목을 잡는 격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느슷한 감독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도 금융영역간 칸막이를 부활시키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백명현 금융투자협회 상무=금융위기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는 국내 금융 상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적정 규제 수준을 100으로 보면 미국은 50이라 강화해야 한다. 이에 비해 우리는 150이기 때문에 오히려 완화할 필요가 있다. 금융투자협회는 선제적 자율규제 강화로 회원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자본시장 전체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상빈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금융위기 원인은 파생상품에 대한 위험관리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과도한 레버리지를 이용한 파생상품이 무분별하게 유통됐지만 제대로 제어할 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시장법이 허용한 파생상품 출시까지 지연시킬 필요는 없다. 폐해를 사전에 제어할 수 있는 위험관리 또는 감독강화를 모색하면 된다. 금융업은 위험을 먹고 사는 것인 만큼 위험부담을 허용하면서 적절히 통제할 방법을 찾는 것이 자본시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첩경이다.
-금융위기로 정부가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금융위기 재연을 막는 데 합리적 규제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과도한 제약은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지 않나.
◆이광수 본부장=금융위기 촉발로 인한 규제 정책은 금융시스템에 내재된 잠재적 위험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정책은 국제적인 공조 속에 이뤄지고 있다. 증권시장에선 공매도 규제가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사모펀드(PEF) 규제완화와 채권시장안정펀드 조성으로 기업자금조달 활성화와 금융시장 경쟁력 강화에도 나서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규제 정책은 금융위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생각된다.
◆백명현 상무=금융투자회사에 대한 시스템 위험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규제는 시장과 투자자 입장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무분별한 규제 강화는 창의력을 약화시켜 금융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다. 영업 활동에 관한 규제는 자율성과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상빈 교수=규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건전성 규제와 영업행위 규제다. 이 가운데 건전성 규제는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영업행위 규제는 풀어야 한다. 금융기관 건전성이 약화되면 이는 금융시장 전체에 영향을 주는 시스템 위험으로 확대될 수 있다. 즉, 건전성을 규제하는 것은 과도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에 비해 영업행위 규제는 금융기관 자율성을 훼손하고 창의성을 저해한다. 이에 대한 규제는 완화돼야 하고 꼭 해야 한다면 공적 규제보다 자율 규제가 적합하다.
-미국은 금융규제개혁안으로 위기 극복을 시도하고 있다. 개혁안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있다면.
◆이광수 본부장=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마지막 해법으로 '금융규제개혁안'을 내놨다. 금융산업에 대한 감독 강화를 골자로 한 새 금융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강력한 금융감독권한을 갖게 됐다. 소비자금융보호국(CFPA)이 신설되고 신용평가회사에 대한 규제도 크게 늘었다. 규제 완화가 곧 만병통치약이 아니란 사실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금융산업이 지속 성장으로 실물경제를 지원하려면 건전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백명현 상무=미국 금융규제개혁안은 FRB 권한 강화와 사전 영업 규제를 골자로 한다. 세계 각국에서도 자국 환경에 맞는 규제개혁안이 나오고 있다. 우리 역시 효율적 위험관리를 위한 개혁안이 필요하다. 국제적인 흐름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한국은행에 보다 많은 권한이 주어질 전망이다. 자산유동화증권과 장외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도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진국과 달리 이미 과도할 만큼 규제를 가지고 있다. 자본시장 위험관리는 자율 규제를 강화하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상빈 교수=미국은 금융규제개혁안으로 대형은행을 감독하는 연방통화감독청(OCC)과 중소형은행을 감독하는 연방저축대부조합감독청(OTS)을 통합하려고 한다. 규모만 다를 뿐인데 감독기관을 나눌 필요가 없어서다. 그러나 현물시장 감독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선물시장을 감독하는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는 이번에도 합치지 않기로 했다. 이는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른 것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결국 FRB가 시장 전체 건전성을, 별도 감독기관이 개별 금융사 건전성을 책임지게 됐다. 거시 건전성과 개별 금융사 건전성은 분리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이는 감독 중복을 초래하고 규제 효율성도 떨어뜨릴 수 있다.
-정부는 동북아금융허브정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주요 국가도 마찬가지다. 급변하는 아시아 금융시장을 고려해 정책을 수정한다면.
◆이상빈 교수=동북아 금융 중심지가 된다는 것은 동북아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한 뒤 이를 세계 금융네트워크에 연결하는 것이다. 세계 금융네트워크에 연결되지 못 한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덩치만 큰 투자은행을 키우는 것은 좁은 연못에서 고래를 키우는 것과 같다. 한국 고유 위험을 증권화한 콘텐츠 개발로 세계 금융네트워크 일원이 되는 것이 동북아 금융허브를 향한 첫걸음이다. 세계 주식시장에 미국 주식만 있다면 투자자는 이것만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한다. 여기에 한국이 한국 주식을 내놓고 세계 주식시장 일원이 됐다고 하자. 세계 투자자는 한국과 미국 주식을 가지고 분산투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은 서로 다른 위험 유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고유 위험을 증권화해야만 세계 금융네트워크에서 독자성도 확보된다.
-금융위기로 선진 금융시장이 추락한 반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신흥 금융시장은 급부상했다. 이런 흐름에 당국과 업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이상빈 교수=금융업은 돈이 모이는 곳을 중심으로 발달한다. 중국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제조업 수출로 막대한 외환보유고가 있다. 그러나 금융업은 아직 취약하고 규제 투명성도 부족하다. 아직 시장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몰빵투자로 고전하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인사이트펀드다. 신흥 금융시장에 대한 투자는 선진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있는 만큼 수익률에 연연하기 보단 위험관리에 더 매진해야 한다. 지금까진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신흥시장 투자가 이뤄져 왔다.
정리=문진영ㆍ김용훈 기자 agni2012@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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