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사라예보는 '유럽 최대의 화약고'였다. 범 슬라브주의와 범 게르만주의가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 대치했다.
마침내 6월 28일, '유럽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사라예보에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심장을 관통한 총탄은 결국 1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 됐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혼란으로 어지러웠던 사라예보는 인류 최대 재난의 시발점이었다.
슬라브 국가들과 게르만국가들 간 감춰졌던 갈등들이 전쟁으로 폭발했듯,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미루고 미뤄졌던 금융계의 개혁 이슈들이 본격적으로 터질 조짐이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에 대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징계로 금융권은 이미 충격에 빠진 상태다.
이어 박해춘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팽배하다.
금융권에는 최근 전·현직 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이 전례 없는 수난시대를 맞고 있다.
이른바 '우리은행 라인'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다. 1조6000억원에 달하는 파생상품 투자 손실 문제가 불거지면서 박이사장과 함께 징계를 받은 황 회장과 이종휘 행장의 거취 문제가 언론에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들은 “박 이사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황 회장의 '버티기' 역시 힘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KB금융은 14일 임시 이사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조담 KB금융 이사회 의장은 "임시 이사회를 통해 황 회장에 대한 거취 문제가 다뤄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나 어떤 형태로든 황 회장과 관련된 논의가 오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종휘 행장 역시 착잡한 상황에 몰리고 있다. 당시 수석부행장으로 최종 책임을 질 위치는 아니었지만, 같은 '주의적 경고'를 받은 박 이사장의 사퇴로 이 행장 또한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하는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다.
이 행장이 당장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금융권의 시각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금융위원회의 결정이 이명박 정부의 대대적인 금융권 물갈이 방침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박 이사장의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휴식과 고향을 위한 역할 수행이지만 금융위원회 징계 이후 정부의 압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 이사장의 사임은 황 회장을 비롯해 징계를 받은 다른 CEO들에게 무언의 압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카드인 셈이다.
IMF 사태 이후 금융권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외국계은행 출신 CEO들이 이번 물갈이 대상이라는 설도 대두되고 있다.
금융계 수뇌진들이 청와대 등에 비리를 제보하면서 자격시비 논란을 일으키는 상황도 감지되고 있다.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는 “모 금융기관 지주회사 회장의 경우 청와대에 산하 은행장의 대출비리를 제보했다가 역으로 자신의 이미지만 훼손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란이 돼왔던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통합문제가 최근 청와대 차원에서 적극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와 금감원이 통합될 경우 통합기구의 수장을 누가 맡느냐의 문제로 또 한차례 시끄러울 수 밖에 없을 전망이다.
2009년 하반기 한국 금융권은 태풍의 핵으로 진입하고 있다.
아주경제= 민태성 기자 tsmi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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