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기의 수레바퀴) ‘어·머·니’라는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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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10-1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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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간의 사랑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담은 옛 말로 ‘후한서(後漢書)’ ‘(송홍전(宋弘專)’에 나오는 유명한 ‘조강지처’ 이야기가 있다.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감찰(監察)을 맡아보던 대사공(大司空) 송홍(宋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송홍은 태생이 온후한 사람이었지만 임금에게 간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광무제는 미망인이 된 누나 호양공주(湖陽公主)를 불러 신하 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물었고, 호양공주는 당당한 풍채와 덕성을 지닌 송홍을 넌지시 언급했다.

마음을 굳힌 광무제는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앉혀 놓고 송홍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불러들였다. 광무제는 “속담에 신분이 높아지면 친구를 바꾸고, 돈을 많이 벌면 아내를 바꾼다고 하는데 그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諺言 貴易交 富易妻 人情乎)”라며 뜻을 물었다.
 
그러자 강직한 송홍은 “신은 가난하고 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고, 고생한 아내는 쫓아 낼 수 없다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臣聞貧賤之知 不可忘 糟糠之妻 不下堂)”라며 거절했다. 광무제와 호양공주는 크게 실망했고, 이후 ‘조강지처(糟糠之妻)’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난 5일 국내 굴지의 그룹인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의 부인인 이정화 여사가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 회장이 세계 굴지의 자동차회사를 일구도록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는 게 알려졌기 때문일까.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8일 이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를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조문을 위해 아산병원을 찾았다.

당나라 때 시성(詩聖)으로 불린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이 70살까지 사는 게 예부터 드문 일이라는 뜻으로, 이를 고희(古稀)라고 부른다. 또 다른 말로는 종심(從心)이라고도 한다. 공자가 나이 70이 되면 뜻한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일컬은 데서 유래했다.

두보 시대에 비하면 천수를 누렸다 할 수 있으나, 의학이 발달한 현재의 삶으로 보면 고인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다.

정 회장과 대학시절(홍익대 미대) 만나 연애 결혼한 고인은 생전 재벌 총수의 아내라는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결 같은 근검함과 겸허함, 조용한 내조와 자식교육으로 ‘현모양처’와 ‘조강지처’의 표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현대가 며느리들이 그렇듯 내치(內治)에 성심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절 외부 행사에 참석하지 않던 고인에게도 피 끌림은 어쩔 수 없었다. 경영 일선에 나선, 막내이자 외아들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작년 1월 제네시스 신차발표회에 이어 정 부회장의 기아차 사장시절 ‘디자인 경영’ 첫 결실인 모하비 신차 발표회에 참석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정 부회장은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행사 도중 “어머님, 감사합니다”라며 깊은 정을 드러냈다. ‘어·머·니’라고 꾹꾹 눌러 발음했던 정 부회장의 애잔한 마음이 퍼지는 상가에 지금 나는, 앉아있다.

아주경제= 김훈기 기자 bo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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