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기의 수레바퀴) 실용주의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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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12-23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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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오래된 농담 하나가 있다. 실용주의의 문제점은 바로 실용성이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유일한 진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싶겠는가?” (건축가 필립 존슨)

노동계에 실용주의(Pragmatism, 프래그머티즘) 바람이 불고 있다. 진앙은 현대차 노조. 노조가 기본급 인상을 동결하자 회사는 통상급 300%에 일시금 500만원, 주식 40주(약 450만원)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노조는 한 사람당 성과금으로 약 1700만원을 지급받게 됐다. 울산에서는 현대중공업보다 많은 돈을 받게 됐다고 노조 집행부가 잔치라도 벌일 분위기라고 한다. 전체 조합원 투표를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실상 이번 임단협 잠정 합의는 예견된 것이었다. 지난 6월 옛 집행부가 내분에 스스로 무너진 이후 중도 실용을 내세운 현 집행부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바꾸겠다고 공약하고도 당선됐기 때문이다. 투쟁보다 내부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국내 대표적 노조이자 금속노조 산하 최대 사업장인 현대차에서 15년 만에 무분규 임단협 타결이라는 이변은 그렇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일부 언론은 이를 ‘신선한 충격’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 글을 쓰는 본인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본급 동결에 노조가 동의한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됐다. 회복되지 않는 세계 경제상황, 연내 타결을 바라는 조합원들의 염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조합원의 실리를 챙기겠다는 의지다. 회사는 현 집행부 집권 이후 상생 차원에서 공감대 형성에 공을 들였다. 이 몇 가지가 이번 결과를 이끌어낸 주역들이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번 일로 인해 노동계에 실용주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실용주의 이면에는 독사가 도사리고 있다. 실용주의 자체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과를 중요시 하지만 과정은 간과돼 있다는 뜻이다.

이는 실용주의 철학의 확립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말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참된 것’이란 곧 편리한 것이고, 진리는 Cash Value(현금 가치)이다. 곧 돈이 되는 것이 진리이다”라고 말했다. 돈 안 되는 진리는 휴지쪼가리에 불과하다는 논리다.

이번 노사합의에서 근로조건 개선과 같은 민감한 사안들이 빠져있기 때문에 실용주의가 정착되고 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파업=현대차노조’라는 오랜 등식이 불성립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진정한 실용주의가 정착되기까지 지난한 세월을 견뎌야 한다. 실용주의라는 말이 결과를 중요시하듯 말이다.

MB의 실용주의가 지닌 맹점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실용주의의 발상지인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은 친기업적이기보다는 반기업적인 인물들이다. 16대 대통령 링컨은 “노동은 자본에 선행하며 독립적이다. 자본은 노동의 아들이며, 노동 없이는 애당초 존재조차 않을 것이다”고 까지 말했다. 필립 존슨이나 링컨의 말은 차치하고라도 다산이 이야기한 도덕성을 기본으로 한 실용주의만이라도 제발 따라 주길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아주경제= 김훈기 기자 bo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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