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왕국'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 9월30일 끝난 2009 회계연도 미국 기업의 특허 신청 건수는 25년만에 두번째 감소세를 나타냈다. 같은 기간 미국 기업이 따낸 특허 건수도 외국 기업의 실적을 밑돌았다. 특허 취득 건수에서 미국 기업이 밀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각에서는 특허를 많이 따는 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경제전문지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28일자 최신호에서 섣부른 특허 경쟁은 소송의 빌미가 되기 쉽다며 특허도 이젠 '양보다 질'로 승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허왕국' 美 위상 추락
미국 특허 출원 추이(1000건·검은색이 미국 기업, 회색이 외국 기업) |
전문가들은 이같은 추세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점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중국 기업들의 추격이 만만치 않은 데다 미국 기업들의 특허 취득 건수는 2001년 정점에서 뒷걸음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싱크탱크인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로버트 앳킨슨 대표는 "미국이 혁신 기반을 잃고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 기업들의 특허 신청ㆍ취득 건수가 감소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연구개발(R&D) 부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세제혜택이 줄었기 때문이다. 미 정부의 세제혜택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1위에서 17위로 추락했다. 기업으로서는 더 큰 혜택을 주는 곳으로 R&D 기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은 해외 R&D센터를 통해 취득한 특허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USPTO는 이를 외국 기업의 특허로 간주한다.
미국의 교육제도와 취업제한도 특허 감소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미국보다 인도와 중국이 매년 배출하는 과학자 수가 더 많은 것은 물론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실정이다. 세계적인 네트워크장비업체 시스코의 마크 챈들러 고문은 "미국은 유학생들이 다른 곳에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며 "유학생들은 입학 허가서와 함께 그린카드(영주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양성하고 이들을 미국에 정착시키지 못하면 혁신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정한 혁신성이 관건"
챈들러는 다만 지금까지 양으로 승부해온 특허 경쟁은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시스코는 이미 3년 전에 특허 전략의 상당 부분을 뜯어고쳤다. 막무가내로는 특허를 신청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그 결과 수년 전 연간 1000건에 달했던 시스코의 특허 신청 건수는 최근 700건대로 급감했다.
기업들은 보통 자사의 지적 재산권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에 특허에 대해 '다다익선' 전략을 고수해왔다. 원천기술에 대한 특허를 보유해야 경쟁업체를 견제할 수 있고 적잖은 로열티 수입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코 역시 5000건 이상의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허 출원 중인 기술도 1만건에 달한다.
그러나 챈들러는 "건수 중심의 특허 경쟁은 더 이상 기업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최근 들어 기업들이 특허 침해 소송에 휘말리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소송을 목적으로 특허를 출원한 뒤 이를 침해한 소지가 있는 기업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려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챈들러는 특허를 많이 보유한 기업일 수록 이런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시스코가 최근 특허 신청 건수를 급격히 줄인 것도 이 때문이다. 시스코는 업계에 새 지평을 열 수 있다고 판단한 기술적 진보에 대해서만 특허를 신청하고 있다. 이런 기술을 가려내기 위해 챈들러는 예닐곱명의 전문가를 기용했다. '혁신매니저'로 불리는 이들은 숙련된 전문가 집단으로 엔지니어링팀과 협업하며 혁신 기술을 찾아내고 있다. 이들은 모두 특허 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변호사들이다.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시스코가 지난해 704건의 특허를 취득, 4186건을 기록한 IBM에 한참 밀렸다는 사실이 결코 시스코의 혁신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아주경제= 김신회 기자 raskol@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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