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MK, 정주영이 못 다한 일관제철소의 꿈 33년만에 이루다

일반인의 눈에는 더 이상 이룰 것도 바랄 것도 없는 86년의 삶을 살았지만,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에게는 두 가지 꿈이 있었다. 왕회장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 재계사에 한 획을 그은 그였지만 정치와 고로제철소 사업은 숙원을 떠나 숙명에 가까웠다. 그만큼 정 명예회장에게 이 두 가지는 애증을 안겨준 것들로 남아있다.

2001년 세상을 떠난 정 명예회장은 정치에서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소원을 풀었다. 1992년 스스로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당 대표 자리에 올랐다. 전국구 대표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재계의 대통령이었지만, 자신의 사업이 번번이 정권의 힘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자 진정한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에게 밀려 정 명예회장은 당선되지 못했다. 이후 자신과 현대그룹은 정치보복을 당해야 했다. 결국 1996년 현대그룹을 정몽구 회장에게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손을 놓게 된다.

나머지 하나인 고로제철소 사업은 정 명예회장에게 유일하게 좌절을 안겨준 사업이다. 7전8기의 오뚝이 정신도 소용이 없었다. 정권의 힘이 늘 그의 의지를 짓눌렀고, 외부 환경도 전혀 도움이 되 주지 못했다. 안 한 게 아니라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 수시로 벌어지는 통에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 명예회장이 정치에 뜻을 두게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고로제철사업에 대한 정 명예회장의 의지가 발원한 곳은 부산의 가덕도였다. 이후 여수를 거처 하동에까지 이르렀다. 말 그대로 7전8기의 숱한 좌절이 그 속에 담겨있다. 자동차와 조선소에 이르는 중공업 제국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철강사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국가가 세운 포항제철의 선철 생산 독점시스템 앞에 매번 무릎을 꿇고 말았다.

포항제철에 이어 정부가 제2제철소 설립을 추진하던 1977년 9월 정 명예회장이 종합제철소 설립계획안을 냈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 “제2제철이 꼭 현대에 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현대가 철 소비산업 중심으로 돼 있어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포철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한 이후 정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제2제철소 건립은 그해 10월 포스코로 결정됐고 1984년 광양제철소가 세워졌다.

불굴의 집념을 보인 정 명예회장은 권토중래의 자세로 10년을 기다리며 철강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첫 좌절을 맛본 1978년 인천제철을 인수하며 철강업에 본격 진출한다.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제철사업을 추진했다. 1994년 부산 가덕도에 제3제철사업을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김영삼 정부 역시 철강공급 과잉이 우려된다며 반대해 무산됐다. 두 번째 실패.

결국 정 명예회장은 1996년 아들인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그룹을 내 주고 물러나게 된다. 아버지의 의지를 곁에서 봐온 정몽구 회장 역시 철강 사업에 대한 강력한 추진 의지를 불태웠다. 정 회장은 제철소 설립을 위한 서명 운동까지 벌였다. 280만명이 동참했다.

그 결과 1997년 10월 김혁규 경남 도지사와 하동군 갈사만에 제철소를 짓기로 하고 기본합의서에 사인한다. 인허가 등 모든 행정절차는 경상남도가 담당하기로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꿈을 아들이 곧바로 성사시키는 듯 했지만 당시 불어닥친 IMF 구제금융 한파로 인해 결국 무산됐다. 세 번째 실패였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정 회장 역시 이를 탓하지 않고 다시 제철사업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2000년 강원산업과 삼미특수강을 인수하고, 2004년 한보철강을 인수하며 철강부문을 강화해 나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정주영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이 마침내 아들은 정몽구 회장 대에 와서 빛을 보게 된다. 2006년 1월 故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고로제철소 설립 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기공식을 연 것이다. 그리고 지난 5일 마침내 제철소의 핵심이자 심장인 1고로에 아들인 정몽구 회장이 아버지를 대신해 첫 불을 댕긴 것이다.

화입식 전인 3일께 당진제철소를 둘러보던 정몽구 회장은 측근들에게 “선대 회장(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꿈을 드디어 이뤘다. 보람 있고 감격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화입식 전날인 4일 온 세상을 마비시킨 폭설도 정 회장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폭설을 뚫고 4일 낮 12시 30분 당진에 도착해 하룻밤을 숙소에서 자고 화입식에 참석한 것이다.그러고 보니 5일 화입식에서 활활 타오르는 점화봉을 지름 15㎝ 화입구에 밀어 넣은 정 회장이 긴장한 듯 잠시 생각에 잠긴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버지라면 이 순간에 어떻게 했을까?’

몸을 숙여 화입구에 불씨를 넣고 110m 높이의 고로를 올려다보던 그가 뒤돌아서서 600여명의 참석자들을 향해 손을 들자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졌다. 그제야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하늘에서 이를 바라보던 아버지 ‘왕 회장’ 역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아주경제= 김훈기 기자 bo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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