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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우리 정치는 4ㆍ19혁명 50년 만에 군부권위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유일한 게임방식이 되었으며 ‘경쟁적 선거를 통한 두 번의 정권교체’로 민주주의 공고화(consolidation of democracy) 단계에 진입하였다.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의 저자인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에 의하면 민주주의 공고화의 기준은 ‘경쟁적 선거를 통한 두 번의 정권교체’인데,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여당-야당을 넘나드는 두 차례의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루어냈다.
영국 의회민주주의는 1215년 대헌장(Magna Carta)에서 기원을 찾는다면 800년이 되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역시 그 시원(始原)을 1620년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에서 찾는다면 400여년이고 독립전쟁에서 찾는다면 200년이 넘는다. 우리는 1945년 미군정(美軍政)이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가져온 이래 65년 만에 이룩한 성과치고는 출중하다. 아시아에서 비교하자면 그나마 안정된 민주주의를 보이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인데 천황제나 과거 자민당 일당 지배, 금권정치와 세습정치의 현실을 보면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밑에 들려오는 ‘파행 국회’ 뉴스는 민주주의 정치발전에 거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 매년 되풀이되는 여야의 법안과 예산안을 둘러싼 갈등, 야당의 회의장 점거, 여야 의원들의 물리적 충돌과 파행적 법안ㆍ예산안 통과는 정치에 거는 희망의 싹조차도 꺾어버린다. 문제는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치가 무원칙ㆍ무책임ㆍ비타협ㆍ싸움과 폭력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언론과 방송도 여야로 편을 갈라 무원칙과 무책임에 동조하고 있다.
민주주의 정치는 사회세력 간의 분열된 의견 대립 속에서도 합의와 결론에 이르는 민주적 방식을 규정해 놓고 있다. 그 원칙은 다름 아닌 다수결(the decision of the majority)에 의한 결정이라는 절차이다.
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대의제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다수결은 ‘소수에 대한 배려’를 항시 함께 한다. 그 ‘소수에 대한 배려’는 설득ㆍ토론ㆍ협상을 진행하면서 ‘필리버스터링(filibustering)’이라는 의사진행 방해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필리버스터링을 종결하고 표결하고 다수결로 가결(可決)되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다수결의 권위 때문이다.
우리 민주주의 정치는 소수의 농성과 표결 방해가 다수에 의한 의결의 절차를 무력화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소수 의견이 다수 의견을 압도하는 ‘소수 독재’의 상황을 일상화하고 있다. 한 예로 작년 민주당의 국회 본회의장 점거와 올해 예산결산위원회 회의장 점거 농성은 대화와 토론이라는 민주주의에 의한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방해하는 반민주적인 행동이자 ‘소수’ 독재의 행동이었다. 86명의 의원을 가진 정당이 169명이라는 의회 다수를 점하는 정당을 이기는, 즉 소수 의사가 다수 의사를 압도하는 정치였던 것이다.
다수결에 이르기 위한 심의와 토론이 소수의 회의장 점거 농성 때문에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소수 야당의 폭력 사용에 의해 심의와 토론의 과정이 없어지고 타협의 기회가 사라져 버리며 결국에는 다수 여당의 단독처리가 일상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국회가 소수당의 방해로 정당한 의사결정에 이르지 못하는 사태가 계속된다면 국회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선거에서 엄중한 국민의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은 오래 전부터 정당을 불신하고 국회 무용론을 제기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정치권이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원칙 있고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기를 기대한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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