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2] 유년시절 ‘호암’에게 도전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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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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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던 해 조선 경남 끝자락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시절 신학문을 접한 그는 일찌감치 나라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는 ‘삼성’을 창업,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을 재건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10년을 맞아 아주경제는 호암 이병철의 삶을 되짚어보고자 특별취재팀을 꾸렸다. 이를 통해 호암 개인의 인생사와 철학은 물론 대한민국 경제사를 반추해본다.
 
그리고 그 첫 작업으로 취재팀은 경남 의령을 비롯해 함안과 진주 등 호암이 유년시절을 보낸 지역을 다니며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새벽 일찍 기행에 나선 취재팀이 처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역설적이게도 호암 선생이 묻혀있는 용인시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이다. 유년의 호암과 만나기에 앞서 어린 시절 가졌던 꿈과 도전의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온 그의 영전에 인사부터 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선영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고 한다. 먼발치서 미술관 전경을 바라보며 짧은 묵례만 남긴 채 취재팀은 경남 의령으로 향했다.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723번지’ 호암 이병철이 태어난 생가의 위치다. 서울에서 4시간 가까이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며 어렵게 찾은 곳. 공용주차장에서 굽이진 골목길 200여m를 걸어가야 생가에 도착할 수 있다. 
   
 
  호암 이병철 생가 전경. 1851년 지어진 이 집은 천석꾼 집안의 가옥이라기엔 검소하고 담백하다.
이 오래된 기와집은 1851년(신해년, 철종 2년) 호암의 조부인 문산 이홍석 선생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기와와 벽 등은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지만 그 뼈대만큼은 1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재하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광으로 구성된 생가는 천석꾼 집안의 가옥이라 하기에는 검소하고 담백한 느낌이다. 마당 곳곳에 위치한 소규모 정원 역시 고사리·토란·작약 등을 재배하는 텃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호암이 태어나기 전부터 재배된 작물을 지금까지도 재배하고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이무형 호암생가 관리소장은 “호암 선생 타계 20주년을 맞아 2007년 11월19일부터 생가를 개방했다”며 “누적 관광객 수는 17만 5000여명에 달하고, 주로 단체관광객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의 설명이 시작되자마자 10여명 안팎의 단체관람객이 생가에 들어섰다. 관리 소장의 간단한 생가 소개가 끝나자마자 찾은 곳은 생가 안마당에 위치한 ‘거북바위’. 이들은 줄을지어 바위에 손을 얹고선 잠시 묵례를 하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생가 안에 거북바위는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손을 올려
  거뭇한 손때가 묻어있다.
일행 중 한명인 이옥선(51, 마산 산호동)씨는 “화장품 영업을 하는 직장동료들과 함께 왔다”며 “부자 기운 받아가고 싶어 거북바위에 손을 올리고 영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부산 소재 문화탐방 모임인 ‘아침을 여는 사람들’ 회원 40여 명도 생가에 방문했다. 전국 곳곳의 문화재를 탐방한다는 이들은 호암 생가에 대해 “집 자체가 고풍스럽고, 빛을 잘 받는 명가”라고 입을 모았다.
 
부산에 유학온 중국 유학생 궈팅팅(郭廷廷, 35)씨는 학교 동료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는 “중국에서도 삼성은 유명한 기업”이라며 “산세가 좋고 운치가 있다. 삼성이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고 답했다. 
   
 
 이무형 호암생가 관리소앚이 방문객들에게 생가와 호암 선생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이 소장은 “호암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조부가 지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며 “하지만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지수보통학교(현 지수초등학교)에 입학해 새로운 문물에 눈을 떴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취재팀의 다음 행선지는 진주에 위치한 지수초등학교로 결정됐다. 진주로 이동하던 도중 취재팀은 의령관문 인근에 있는 솥바위를 찾았다. 솥뚜껑을 닮은 이 바위는 물 아래에 솥 다리처럼 세 개의 발이 받치고 있다 한다. 예부터 이 바위 반경 20리(8㎞) 안에 큰 부자 3명이 난다고 전해졌다.  
   
 
  의령관문에 위치한 솥바위. 이 바위 인근 20리 반경에 큰 부자 3명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있다.
  (사진=의령군 제공)
실제로 의령군 정곡면에 삼성 이병철, 진주시 지수면 LG 구인회, 함안군 군북면 효성 조홍제 등 세 명의 대그룹 창업주가 솥바위 인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긴 시간 동안 솥바위 8km 반경에서 태어난 사람의 수만 해도 수십만에 달할 것. 이들의 성공은 전설 때문이 아닌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재능 덕일 것이다.
 
남해고속도로 지수IC를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5분여 정도 더 달려 도착한 지수초등학교. 이 학교는 시골 읍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차선 왕복도로 중간에 위치해있다. 이곳에서 호암은 신학문에 대한 목마름을 어느정도 해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취재팀 역시 허기를 해소하고자 인근 식당을 찾았다. 1인당 5000원에 십여가지의 반찬과 갈비찜 등이 나오는 푸짐한 상차림. 먼길에서 찾아온 타지 손님임을 짐작한 주인 아주머니는 여분의 공기밥을 상자락에 올리는 넉넉함을 보인다.
 
식당 아주머니는 “이병철 회장 뿐 아니라 LG 구인회 창업주도 지수보통학교 동문”이라며 “두 분은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니며 함께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효성 조홍제 회장과 GS그룹 허정구 회장도 동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밥상 인심만큼이나 푸짐한 취재 인심이다.  
   
 
   지수초등학교(당시 지수보통학교) 전경. 전교생 30명 남짓의 이 시골학교는 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
   과 고 이병철 회장이 함께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한국 재계의 큰 별들이 나왔지만 현재는 전교생 30명 남짓한 작은 초등학교에 불과하다. 다만 구인회 선대 회장의 아들인 구자경 회장이 기부한 학교 강당은 구 회장의 호를 따 ‘상암관’이라고 명명됐다. 재계 주요인사들을 배출했다는 유일한 흔적이다.
 
늦은 나이에 댕기를 자르고, 신학문에 눈을 뜬 호암은 지수보통학교에서 더 큰 세상으로 도전을 꿈꾼다. 서울 유학의 뜻을 품은 것. 결국 호암은 지수보통학교에서 짧은 배움을 마치고, 외가가 있는 서울로 상경했다.
 
1922년 13세 소년인 호암은 함안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탔다. 현재 함안역은 무궁화호만 종종 들리는 간이역이다. 서울행 열차는 하루에 한 대만이 정차한다. 상행선과 하행선 열차도 각각 여섯 대에 불과하다. 이렇듯 조그마한 지역에서 유년을 보낸 호암은 어떤 포부를 갖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까?
 
   
 
  함안역 전경. 현재 무궁화호 열차가 왕복 12회 정차하는 이 조그만 간이역에서 13세 소년 이병철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전의 발을 딛었다.  
이후 서울에서 그의 행적을 보면 조금이나마 그의 도전정신을 엿볼수 있다. 수송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 수업을 받기에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결국 호암은 수송보통학교에서도 하위권이었던 성적에도 불구하고 중동중학교에서 1년동안 2~3년 상당의 수업을 단기 속성하는 과정을 수료한다.
 
그리고 이후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지병으로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 학업을 위한 도전을 거듭한다.
 
청년시절 호암의 경영 활동은 도전과 실패, 좌절과 이를 이겨내는 재도전으로 이어진다. 천석꾼 집안의 자제로서 집안의 후원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그 인생역정이 상당 부분 다르다.
 
그리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해온 그이기 때문에 지금의 삼성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편안한 유년을 마다하고 새로운 학문을 찾아, 더 큰 세상을 찾아 끊임없는 도전과 고난을 겪은 호암 이병철. 더 큰 세상으로 향하는 함안역의 길게 뻗은 철길 앞에서 그는 자신만의 발전이 아닌, 조국의 발전을 꿈꾸며 미지에 세계로 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꿈은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큰 호수(湖)와 바위(岩)가 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난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호암자전 중 반도체 산업 도전에 대한 호암의 발언)

아주경제= 특별취재팀(이형구·이하늘·감혜림 기자) scaler@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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