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3] “인재가 만사”…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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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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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병철이 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전자제품 브랜드 ‘내쇼날’(National), ‘파나소닉’ 등으로 잘 알려진 마쓰시다 전기산업(현 파나소닉)의 창업주다.

그는 당시 직원에 대한 배려에 인색한 일본 기업들과는 달리 복리후생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평생직장’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연공서열 등 근대 일본기업의 인사제도 정착 역시 그의 작품이다.
 
경영에서도 한 발 앞선 전략을 선보였다. 그는 일찌감치 주5일 근무제를 실시했다. 또한 지역별·제품별로 사업을 나눠 관리하는 사업부 제도를 동양 최초로 도입했다.
 
그 결과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무일푼에서 시작해 자신의 세대에 마쓰시타 전기산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웠다. 뿐만 아니라 패전 후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여러 부분에서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은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비슷한 길을 걸으며 삼성을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호암은 ‘인재제일(人才第一)’을 가장 중요한 경영 원칙으로 삼았다. 대한민국 최초로 공채제도를 도입한 것도 삼성이다.
 
1954년 완공한 제일모직 공장에는 기숙사를 지었다. 당시 우리 경영환경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도심으로 이동한 시골 출신 여공들의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한 것.
 
한국전쟁 후 잿더미로 변한 한국을 반세기 만에 경제대국 반석 위에 올린 것 역시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비견된다.
 
특히 호암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사업을 통해 국가에 보답한다)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식민지 시절 나라 없는 서러움을 톡톡히 당했던 그는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겠다는데 일조하겠다는 신념을 지켰다.
 
‘호암자전’을 살펴보면 사업보국을 향한 호암의 뜻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제일)제당 설립 2년 만에 거부의 칭호를 받았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나... 신생 조국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준명 전 삼성 회장 비서실 비서팀장도 최근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회장께서는 늘 이익이 나도 해서는 안 될 사업이 있고, 적자가 나도 해야 할 사업이 있다고 강조했다”며 “삼성은 국가적 필요성과 국민의 이해, 세계시장에서의 경쟁 가능성 등을 판단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현재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한 축인 반도체 산업이지만 진출 당시 정부와 언론 등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에 우려를 표했다. 그럼에도 호암은 국가경제의 미래를 위해 반도체 산업 진출을 강행했다.
 
호암은 생전에 반도체 사업에서 흑자가 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희 전 회장 세대에서 삼성은 메모리반도체 부문에서 세계 1위로 성장, 한국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호암이 마쓰시타 고노스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삼성은 그 규모나 기술면에서 파나소닉을 앞서고 있다. TV 시장에서도 삼성은 4년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다. 휴대폰도 1위와 격차를 줄이고 있다. LCD 등 디스플레이 사업도 세계 정상이다.
 
이 같은 삼성의 성장에는 정보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호암의 통찰력이 큰 역할을 했다. 호암은 1960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7년까지 정초에 도쿄에 머물며 사업을 구상했다. 이른바 ‘도쿄구상’이라고 불리는 그 것이다.
 
이길현 전 삼성물산 도쿄지점장의 회고에 따르면 호암은 도쿄에서 수많은 인사들을 만나 주로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이러한 만남과 구상의 시간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면 삼성이 새로운 사업에 진출했다는 소식이 도쿄로 들려왔다는 것이 이 전 지점장의 증언이다.
 
정보 중심 문화는 고스란히 삼성 전 직원들에게 전파됐다. 한때 “삼성의 정보력이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를 능가한다”는 말이 나돈 것 역시 삼성 정보력의 힘을 말해준다.
 
이는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일본의 모 반도체 기업 견학에 나섰던 한 삼성전자 인사의 증언에서도 나타난다.
 
“일본 기업이 기술 유출을 우려해 반도체 생산 공정 견학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시찰에 나섰던 삼성 직원들은 공장에서 본 도면을 외워 밤에 숙소에서 이를 다시 그렸다. 이러한 작업은 삼성이 반도체 기술을 습득하는데 큰 도움이 됐으며, 결국 삼성의 반도체 기술은 일본을 넘어설 수 있었다.”
 
‘이병철 경영대전’ 등 호암과 삼성에 정통한 서적을 다수 집필한 작가 홍하상은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삼성은 동원 가능한 전 자산을 투자했다”며 “이처럼 자산 전체를 ‘풀 베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보수집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정보 수집과 분석도 중요하지만 이를 토대로 한 과감한 결단에 이르기 까지 호암은 가장 뛰어난 정보 활용 능력을 갖춘 경영자”라고 평가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이형구·이하늘·감혜림 기자) scaler@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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