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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시리즈 8] "나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판단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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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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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도 꺼리던 전자산업 뚝심으로 밀어부쳐
- 부하직원 말린 음반사업 시도조차 안해


쌀 300석을 사업밑천으로 시작해 세계 일류 기업 ‘삼성’으로 자리 잡기까지 호암 이병철은 수많은 적과 위기를 만났다.

호암은 이러한 방해요소를 효율적으로 극복하는 경영자였다. 경쟁자의 견제와 위기상황 속에서 밀고 나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히 판단했다. 그리고 계획이 확정되면 어려움을 무릅쓰고 과감히 이를 실행하는 뚝심을 보여 왔다.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이에 맞춰 적절한 대응에 나서는 호암의 경영 스타일은 쌀 300석의 작은 정미업체가 오늘의 ‘삼성’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호암은 사업 시작부터 덩치가 큰 적과의 한판승부를 벌여야 했다. 호암은 첫 사업 당시 대도시에 비해 규모가 작은 마산에서 정미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마산에 자리 잡은 일본 정미업체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일본 정부는 조선의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몰아주는 한편, 상권 장악에 나서고 있었다. 결국 사업 1년 만에 자산의 3분의 2가 잠식되는 위기에 봉착했다. 
 
여기서 호암은 승부수를 던졌다. 쌀값변동에 관한 소문과 정반대로 움직인 것. 쌀값이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돌때 호암은 오히려 쌀을 팔았다. 그리고 떨어질 때 구매에 나섰다. 이 같은 방식으로 호암은 정미업에서 큰 이익을 거뒀다.
 
제일모직 설립 당시에도 호암은 여러 차례 견제를 받게 된다.
 
재계에서는 “제당사업을 요행으로 성공하더니 세상만사를 쉽게 생각한다. 400년 전통의 영국 모직과 경쟁한다는 발상부터가 어리석다”며 호암의 실패를 예상했다.
 
미국의 모직기계 메이커인 ‘파이팅’사 역시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으니 우리 기계를 사야한다”며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호암은 기계의 장단점을 분석해 가장 적합한 제품으로 독일(당시 서독) 기계를 선정했다. 이에 파이팅의 중역은 “한국이 자력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3년 내에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된다면 하늘을 날겠다”며 비꼬았다.
 
이 같은 우려와 폄훼 속에서 제일모직은 창사 2년만인 1956년 영국제품의 5분의 1 가격 수준의 양복지 생산에 성공했다. 호암은 직접 제일모직의 원단인 ‘골덴텍스’로 재단한 정장을 입었다. 출시 당시 ‘국산제품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소비자들의 편견도 호암의 솔선수범과 입소문을 통해 점차 수그러들었다. 이후 제일모직은 성공을 거듭하며 제일제당과 함께 삼성그룹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한국비료 원자재 유출 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호암은 1969년 삼성전자공업(삼성전자의 전신)을 창립하며 오히려 사업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호암이 재계에서 영원히 은퇴할 것이라는 추측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자산업을 통해 분위기 반전에 나섰다.
  
초창기 삼성의 전자산업 도전은 녹록치 않았다. 국내 기존 전자업체들은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을 견제했다. 정부 역시 삼성의 전자산업 도전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 결과 삼성은 생산한 전자제품 전량을 해외에 수출하는 불리한 조건으로 전자산업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삼성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한다. 1975년 당시로는 획기적인 ‘예열이 필요없는’ 이코노TV를 생산해 기술을 주도했다. 1978년에는 흑백TV 200만대 생산에 성공, 세계 최대 생산 기록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삼성전자는 4년 연속 전체 TV 시장 1위를 기록하며 디스플레이 시장과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호암의 업적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는 반도체 사업 역시 진출 당시 정부와 언론, 여론 등의 질타를 받았다. 우리 기술로는 턱도 없다는 비관론과 삼성같은 대기업이 반도체 사업에 실패하면 이는 결국 국가경제의 위기가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호암은 비판 여론을 정면 돌파했다.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이후 1982년 D램 산업 진출에 이르기 까지 8년 동안 그는 국내외 수많은 전문가들을 만나며 정보 분석에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발표, 73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모험에 나섰다.
 
호암은 그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통해 “전자혁명의 물결에서 뒤지기 시작하면 영원히 후진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반도체산업에서의)성패는 삼성의 운명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좌우할 것”이라며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렇듯 대부분이 불가능해보이는 사업에 도전해 성공을 거듭한 호암이지만 물러설 때에는 과감히 미련을 버릴 줄 알았다. 1970년대 초반 호암은 조선업 진출을 결심한다. 노동집약적인 조선사업에서 근면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국내 인력이라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일본 IHI와 합작을 통해 조선업 진출 청사진을 완성했다. 1974년에는 정부의 인가까지 받았다. 하지만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고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조선업이 된서리를 맞게 됐다. 이에 호암은 미련 없이 조선소 착공을 뒤로 미뤘다.
 
그리고 오일쇼크 파동이 마무리된 1979년 거제조선소에 1호 도크를 완성해 본격적으로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현재 삼성중공업은 세계 조선사업 1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첨단선박 제조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다.
 
이처럼 경쟁을 거듭하며 50여 차례의 성공신화를 일군 호암도 결국 시도조차 하지 못한 사업이 있다. 바로 음반사업이다. 그는 전례 없이 두 차례나 음반사업 추진에 나섰지만 시장성이 없다는 실무진의 보고에 미련 없이 물러섰다.

오너의 사업추진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냉정하게 평가해 두차례나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하직원과 이러한 아랫사람의 판단에 수긍할 줄 아는 리더의 자세 모두 높이 평가할만한 사건이다.
 
이는 “사업에는 착수하는 용기와 함께 물러서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호암의 평소 신념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한마디 속에는 지난 73년 동안 수많은 경쟁과 위기 속에서 우뚝 솟은 삼성의 성공 비결이 담겨있다. 지는 싸움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히 이를 포기하는 용기를 담고 있는 것.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삼성은 언제나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삼성은 나날이 발전하는 대한민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성장하고 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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