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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시리즈 9] 정치권과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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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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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지않는 나무닭 '목계' 교훈으로

돈과 정치는 결단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가. 기업가가 권력을 가까이 하려는지, 정치가가 돈을 필요로 하는지는 모르되, 불가분(不可分)인 것은 분명한 듯 싶다. 호암 이병철회장은 정치권과는 너무 가까이 해도 안되고 너무 멀리 해서도 안된다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인 셈이다.

호암이 삼성의 이건희 명예회장에게 경청(傾聽)과 함께 교훈으로 남겼다는 목계(木鷄). 이 울지 않는 나무 닭에 숨은 뜻을 헤아려 보면 호암의 정치적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장자(莊子)의 달생편(達生篇)에 나오는 얘기다. 싸움 닭 조련에 능한 ‘기성자’가 있었다 한다. 그는 왕의 부름으로 왕실의 싸움 닭을 조련하게 됐다.

왕은 열흘이 멀다하고 성과를 채근했다. “대충 되었는가”라고 물어오자 기성자는 세 번씩이나 아직 멀었다고 응수했다. 처음엔 “아직 불같은 기운이 넘치고 어떤 닭과도 싸울 태세로 공연히 뽐내기만 하고 자신의 기운을 너무 믿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아직도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그림자만 봐도 덮치려고 난리를 칩니다”라고 했고, 나중엔 “적을 오직 노려 보기만 하는데, 여전히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가시지 않았습니다.”라고 응답했다.

40일이 지나서야 그는 “상대 닭이 아무리 소리 지르고 덤벼도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나무로 만든 닭과 같습니다. 다른 닭들이 보고는 더 이상 반응이 없자 다들 그냥 가버립니다”라면서 조련을 마쳤다고 한다.

결코 범상치 않은 목계의 교훈은 호암의 어떠한 고뇌에서 나온 것일까. 호암이 이끈 50년 삼성의 역사(1938년~1987년)가 파란만장한 대한민국의 정치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 때문이리라. 건국 후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부친과 막역한 사이였던 천운(天運)덕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호암. 그에게도 오래지 않아 정치적 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정치적 시련기는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군부 쿠테타 시절. 군사혁명 정부는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기업매출액 순위 1위부터 11위까지 11명을 부정축재자로 지명했는데, 당연히 1호는 호암 이병철회장. 일본에 체류중이던 그는 도쿄(東京) 제국호텔에서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용의가 있다”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귀국했다. 혁명수반 박정희와의 독대를 비롯, 우여곡절 끝에 호암은 삼성을 지켜냈다. 목계처럼 맞대응하지 않음으로써 20여년 전통의 삼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위기는 1966년 한국비료 밀수사건. 한국비료는 연간 33만톤 규모의 세계 최대 비료공장이었다. 삼성은 일본의 미쓰이그룹으로부터 4200만 달러 상당의 한비 설비를 차관으로 들여왔다. 문제는 미쓰이그룹이 감사의 표시로 준 100만 달러. 외환관리법상 100만 달러를 현금으로 들여 올 수 없었기에 삼성은 박정희 정부와 조율 끝에 식품에 단 맛을 내는 사카린의 원료와 양변기 등 소비재로 대체 수입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진 것이다. 언론은 삼성같은 대기업이 폭리성 밀수를 했다고 맹폭을 가했다. 호암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다. “입을 열면 모두 변명으로 밖에 받아 들여지지 않는 분위기 였다”고 술회한 호암은 이때도 목계의 심정이었을까.

세 번째 정치적 역풍은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시절 불어왔다. 그때도 호암은 TBC(동양방송)를 국가에 헌납했다. 자신의 도쿄 집무실 바로 옆방에 TBC 스튜디오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TBC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1987년 호암은 세상을 떠난다.

호암의 정치적인 번민은 이웃 일본의 ‘경영의 신’ 마쓰시다 고노스케 고뇌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하는듯하다. 고노스케는 ‘일본의 경제는 일류지만, 정치는 삼류’라는 번민 끝에 1979년 정치가 양성소인 ‘마쓰시다 정경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90세였던 1985년까지도 신당창당을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2년 1월 기성정치권을 향해 작심하고 국민당을 창당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31석을 얻는 선전을 했지만, 12월 대권도전에 실패한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경제인에 의한 정치권 도전은 시도되지 않고 있다. 1995년에는 삼성 이건희 전 회장이 중국에서 ‘한국 경제는 일류, 정치는 삼류’라고 말해 정치권을 긴장시켰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2010년 2월 1일. 호암은 하늘에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쓰시다 고노스케와 정주영회장에게도 목계의 교훈을 신년 덕담으로 얘기 했을까. 아니면 삼류 정치의 개혁안을 놓고 토론했을까.

아주경제= 인문자(人文自) hc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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