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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시리즈 10]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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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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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은 반드시 그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 이것부터 우선 인식하고 나서 사업을 운영할 때에는 첫째 국내외 정세의 변동을 적확하게 통제해야 하며, 둘째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그 한계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하고, 셋째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하며, 넷째 직관력의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2, 제3선의 대응책을 미리 강구함으로써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고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청산하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호암자전 중)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은 승률 96%의 놀라운 사업 성공 능력을 갖춘 경영인이었다. 하지만 그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아울러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에는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실리 모두를 잃어야 했던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좌절은 결국 호암을 더욱 강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호암은 정미사업과 운수사업에서 성공하며 자신감 넘치는 청년 실업가가 됐다. 지금껏 실패를 몰랐기에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이농자가 속출하면서 김해 지역 농토가 싼 가격에 매물로 쏟아져 나오자 토지사업에 뛰어들었다.
 
토지사업 1년 만에 호암은 200만평 농지의 대주주가 됐다. 하지만 넓은 농지를 사들이기 위해서 그는 식산은행 마산지점에서 융자를 받았다.
 
그는 농지의 소작료에서 은행융자금과 세금 관리비를 빼고도 논 한마지기당 10원의 수익이 남는다는 계산을 마쳤다. “이렇게 쉬운 돈벌이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라던 그의 기대는 벼농사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인해 산산조각났다.
 
전시체제 아래 일본정부는 은행들에게 대출을 중단하고 그간 융자한 돈을 회수하라는 비상조치를 취했다. 결국 호암은 식산은행에 빌렸던 돈을 모두 반납해야했다. 그간 사두었던 전답의 가격도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호암은 시가보다 싼 가격에 전답을 모두 처분했다. 그래도 융자금을 상환할 수 없어 결국 정미소와 운수회사마저 모두 팔았다. 수중에 남은 것은 전답 10만평과 현금 2만원이 전부였다.
 
사업에 뛰어든지 2년 만에 흥망성쇠를 모두 경험한 것. 갑작스런 전쟁만 아니었으면 그는 대지주로서 정비사업 당시보다 많게는 수십 배의 자산가로 거듭났을 것은 확실했다.
 
서른이 채 안된 젊은 나이인 그는 이러한 실패의 책임을 다른데 돌리지 않았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가 없다”며 오히려 사업을 시작하기 전 그 시기와 정세를 미리 판단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 호암은 현실을 직시하고, 실패라고 생각되면 미련을 버리고 깨끗이 물러설 줄 알았다. 두 차례에 걸친 음반사업 시도는 ‘경제성이 없다’는 실무진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상당부분 진행됐던 조선사업 진출 역시 외부 정세를 판단해 그 시기를 미뤘다. 사전조사도 철저했다. 호암의 가장 큰 역작인 반도체 사업은 8년여의 준비과정 동안 정보수집과 분석이 철저히 시행됐다.
 
호암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두 번째 실패를 맛보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전 재산은 인민군에게 강탈됐다. 인민군이 물러난 후 인천과 용산 창고에 있던 물품들도 모두 사라졌다.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잃게 된 것.
 
구원의 손길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왔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의 한 양조업체를 인수한 호암은 이를 김재소.이창업.김재명 등에게 위탁경영시켰다. 호암은 이들을 신뢰해 그간 양조사업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양조장을 경영하던 이들 셋은 대구로 피난 온 호암에게 당시 돈으로 3억 원의 수익금을 내밀었다.
 
“완전한 신뢰는 사람이 가진 능력 이상의 것을 발휘하게 만든다”는 호암의 인재론은 이들 셋에서 기인했다. 호암은 이후 한번 채용한 인재는 실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믿고 가는 뚝심을 보였다. 한국전쟁으로 10여 년간 쌓은 기업이 한줌 재로 변했지만 그보다 큰 교훈을 얻게 된 것.
 
그의 마지막 실패는 1966년 한국비료 보세창고에 ‘OTSA’라는 일종의 사카린 제품이 현장 사원의 부주의로 정부 허가 없이 시중에 유통되면서 시작됐다. 이에 언론 등은 ‘재벌기업의 밀수’라며 도덕적 해이를 문제 삼아 연일 대서특필했다. 당시 정치구조상 정치권의 비난도 계속됐다. 결국 호암의 차남 이창희와 직원 일부가 구속되며 연일 삼성의 부도덕성에 대한 성토가 계속됐다.
 
이에 호암은 정치권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OSTA 문제가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무시한 채 강제조사를 받은 것은 몇몇 정치인의 공작이 있었다...장차 그 진상이 밝혀질 것”이라며 예외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드러냈다.
 
한국비료 사업은 당시 박정희 정부의 강권에 의해 진행됐다. 호암은 수차례 거절했지만 결국 한국경제 등을 감안해 위험요소가 다분한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 공장 건설 착수 이후 그는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이를 통해 한국비료는 세계 최대 규모의 비료공장으로의 탄생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호암은 자신과 삼성 임직원들의 피와 땀이 섞인 이 공장이 개설되기 직전 정부에 한국비료를 헌납하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삼성은 정치권과의 거리두기에 나섰다. 경제인과 정치인의 사이는 가까워서는 안된다는 철학을 세운것. 이후 삼성은 본업인 사업 확장과 강화에 역점을 둠으로써 정치권의 입김에 휩쓸리지 않을 기초체력을 다졌다.
 
이처럼 세 차례에 걸친 실패에서 호암은 눈에 보이는 실(失)보다 큰 것을 얻었다. 사업 착수 이전에 철저한 조사를 시작하고 이미 시작한 사업이라도 실패가 예상되면 냉철한 판단을 통해 물러설 수 있는 삼성의 지혜는 그의 첫 실패에서 비롯됐다. 인재에 대한 믿음은 두 번째 실패가 있었기에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삼성은 인재 양성소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 조직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마지막으로 경영 본연에의 충실과 정치권과의 거리두기는 한국비료에서 기인했다. 이로 인해 삼성은 정치권의 당파싸움에 흔들리지 않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삼성의 100년 DNA로 승화돼 과거는 물론 미래 삼성 경영의 ‘바이블’로 자리하고 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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