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12] 거미형 인재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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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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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절과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50여년만에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10대 대국으로 성장하기 까지 이를 이끈 것은 개미처럼 묵묵히 최선을 다한 국민들의 노력 덕이었다. 때문에 한국사회에서는 무조건 최선을 다하는 개미형 업무 스타일이 미덕으로 인정받아왔다.

하지만 최근 국내 업무 트랜드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인터넷 환경과 기성세대에 비해 더욱 넓고 돈독한 인맥을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기존 무대뽀 업무 스타일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뜨고 있는 것.

거미형 업무방식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업무 스타일은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쉰다'는 것이 특징이다. 쉬는 것 역시 업무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들 거미형 직장인들은 인터넷 정보검색·블로깅·카페·트위터 활동 등을 통해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손쉽게 얻는다. 학창시절 부터 쌓아온 인맥도 최대한 동원한다. 해외 여행 중 만난 외국인 친구도 중요한 인맥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특징은 기존 세대와 달리 대학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다양한 외부활동을 해온 신세대 직장인들에게서 두드러진다.

사냥감이 자주 다니는 통로에 덫을 놓고, 때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이들에게 인터넷 활동 및 지인과의 친교는 사냥감을 기다리는 거미와도 같다. 이들은 다양한 통로에 거미줄을 친다. 이곳저곳 연결된 거미줄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고, 이러한 정보를 활용하는 방법까지 체득한다.

이들에게 업무 외 활동도 업무의 한 방식이다. 휴식과 놀이 역시 업무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이러한 스타일의 대표적인 인사로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을 들 수 있다.

근대화 시절 대다수의 CEO들은 현장 중심 경영을 강조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현장에 내려가 부하직원들을 독려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호암의 스타일은 그들과 달랐다.

호암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사전에 계획한 일정대로 움직였다. 국내에서 그의 일정은 9시 5분전 태평로 집무실에 출근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호암은 원두커피 한잔을 마시며 당일 스케쥴과 날씨를 확인한 후 신문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퇴근은 오후 6시를 넘지 않았다. 취침 시간은 오후 10시 이전이었다.

다급한 상황에 부딪혀도 호암의 일정은 변화가 없었다. 이와 관련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은 호암에 대해 "사업의 부침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호암은 1959년 일본 도쿄에서 방송을 통해 국제정세를 접하고 이를 통해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시작한 이후 매년 연초 도쿄를 찾았다. 호암이 도쿄에 머무르는 시간은 1년 중 절반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이라는 큰 기업을 이끄는 수장이 해외에 체류하는 시간이 긴 것은 어찌보면 사업에 대한 열의가 부족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다.

오히려 도쿄에서 호암은 수많은 정보를 취득했다. 당시 전세계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국내와는 달리 도쿄는 더욱 폭넓고 깊이 있는 정보들이 넘쳐흘렀다. 아울러 일본에 있는 재계 인사들을 통해 호암은 다양한 정보와 사업 노하우를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도쿄구상을 마친 호암은 국내에 돌아가 매번 굵직한 사업계획을 발표하곤 했다.

호암은 △도쿄지바우라전기(현 도시바) 회장과 경단련(일본의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토고 도시오 △세계 최대 제철기업인 신일본제철 탄생의 주역 이나야마 요시히로 △일본 생산성본부 최대 회장을 지낸 이시자카 다이조 △일본상공회의소 회장 출신인 나카노 시게오 등 일본 재계 100대 거물들과 친분을 쌓았다.

세계 최고 기업 가운데 하나인 삼성전자 출범 역시 호암의 인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삼성전자의 전신 가운데 하나인 삼성산요전기 창립 당시 호암은 산요전기 회장인 아우에 토시오와 만났다. 여기서 호암은 전자산업이 기타 제조업에 비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후 삼성전자는 전자산업의 꽃인 반도체 산업 진출까지 나선다.

1982년 18년만에 미국을 방문한 호암은 체류기간 동안 접한 정보를 토대로 반도체 사업을 결심한다. 1980년 일본의 경제전문가 이나바 박사와의 면담을 통해 일본 산업의 방향전환을 들은이후 이를 확인하기 위해 18년만에 미국행에 나섰다. 보스턴대학의 명예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3주간의 짧은 방문 기간 중 호암은 GE·IBM·HP 등 미국 유수 기업들을 시찰했다.

또한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불황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철강 자동차를 중심으로 미국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일본이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을 통해 세를 부풀리는 것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그 결과 호암은 "한국의 살 길은 첨단기술산업의 시급한 개발밖에 없다"며 반도체 사업에 대한 의지를 강화했다. 

이후 호암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일본의 대표적 반도체 연구자인 오타니 다이묘 산켄전기주식회사 회장과 수차례 만나 반도체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오타니 회장만으로 부족했던 호암은 일본 반도체의 어머니라 불리는 샤프의 사사키 부사장도 만났다. 후지화학 이나바 슈조 박사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국내 삼성전자 강진구 사장과 김광호 반도체 사업본부장에게도 반도체 사업과 관련한 논의를 지속했다.

다양한 정보를 접한 호암은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삼성그룹의 선언문을 발표하며 반도체 진출 대장정을 시작했다.

호암의 이같은 정보수집은 재계 거물과 기술 전문가에 국한되지 않았다. 호암의 단골 이발소로 알려진 '모리타 이용점' 이발사와의 대화(본지 5일자 참조)와 호암 자신을 포함한 국내외 경제 거물들에게조차 예약시간보다 늦게 도착해 자신의 요리를 최고상태에서 제공할 수 없게됐다며 호통을 친 일본 복요리 집 주인에게서도 교훈을 얻었다. 이들의 장인정신은 삼성의 '품질제일' 철학을 완성하는 밑거름이 됐다.

일본의 주요 인사 300명만이 가이할 수 있는 골프클럽인 '300CC' 회원 가입 역시 단지 골프를 즐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거물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자리에 참여함으로써 이들과 친교를 쌓고 이를 통해 수많은 고급 정보들을 취득하는 통로를 마련한 것. 

삼성상회 경영 당시 대구 유지와 경제인들의 모임인 '을유회'에서도 호암은 친교 그 이상의 것을 이끌었다. 이 모임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언론사 창간에 나섰다. 또한 고미술·서화·도자기 감상 등의 취미를 공유하며 호암은 우리 문화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그리고 이는 훗날 호암박물관 건립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호암은 해외 방송부터 일본과 국내의 주요 인사, 여행길에서의 소회, 서민들의 삶, 서적과 언론 등 다양한 통로를 마련해 사냥감을 포착하는 경영 스타일을 지속했다. 그리고 이러한 호암의 경영은 국내 최초의 거미형 업무의 시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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