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은 성공을 거듭하 대표적인 성공한 경영인이다. 그는 1936년 26세에 선친에게 받은 연간 쌀 300석 상당의 토지를 물려받은 돈으로 정미사업을 시작한 이후 1987년 7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총 57개의 사업을 벌이며 왕성한 사업을 지속했다.
하지만 호암을 단순히 성공한 기업인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그는 단순한 부의 축적과 명예를 추구하는 사업가의 범주를 넘어서는 경영인이었다.
끊임없는 고민과 결단, 그리고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밀어붙이는 뚝심에 이르기 까지 호암은 삼성 초창기 사업이 궤도에 오른 이후 호암은 항상 ‘사업보국’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실 사업 초기 호암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고민이 깊지 않았다. 1936년 정미업으로 성공한 호암은 마산 일대의 전답 200만평을 매입하며 토지사업에 나섰다. 말이 좋아 토지사업이지 사실 토지 수탈로 이농자가 늘자 이를 이용해 싼 매물로 나온 전답을 대거 매입하는 부동산 투기에 가까운 사업이었다. 아울러 마산 시내의 기생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러모아 유흥에 심취하는 등 사업 성공으로 모은 돈을 주체하지 못했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같은 호암의 방만한 생활은 1938년 삼성상회 설립 이후에도 계속 됐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 역시 성공한 호암에게 고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호암은 그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통해 자신의 무절제한 일상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고를 서슴치 않은 사람으로 고(故) 채현병 선생을 들고 있다.
채현병의 충고와 일제의 수탈 속에서 고통받는 민족을 보며 호암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해방 이후 호암은 대구지역 사업가들과 함께 대구일보를 창간하며 언론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민생 안정을 위해 경제질서 확립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삼성물산공사를 창립했다.
전쟁 후에도 이러한 그의 철학은 계속됐다. 생필품 무역으로 자본을 확충한 호암은 국가산업 재건을 위해 제조업에 뛰어든다.
“국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비물자를 수입에만 의존하면 언제까지나 벗어날 수 없다...우리 국민이 소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며 제일제당 설립에 나선 것이다.
생필품인 설탕을 수입제품의 3분의 1 수준에 공급하는 제일제당은 국민의 생활고를 덜었을 뿐 아니라 사업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호암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은 많은 부문에서 수입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호암은 자칫 실패하면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들을 모두 잃을 가능성이 높은 모직 산업에 진출한다.
이에 대해 호암은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는 그것(제일제당 설립)으로 충분했을 것이나...신생조국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마침내 1955년 설립된 제일모직은 국내 모직 시장 장악 뿐 아니라 해외 수출에도 한 몫을 하며 삼성물산, 제일제당과 함께 삼성이 일류기업으로 성장하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
제일모직 설립 이후에도 호암은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초대 회장을 맡으며 국내 산업 육성에 힘을 실었다. 또한 삼성전자와 삼성중공업을 창립했다. 이후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며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전자와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국내외의 많은 반대와 질타가 있었다. 하지만 호암은 “국가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이들 사업은 한국 산업의 세계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호암은 국가를 위한다는 당위성만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호암은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비료공장 설립과 관련해 부정적인 입장을 꾸준히 유지했다.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였다. 호암은 사업을 시작하기 전 성공 가능성에 대해 정보조사와 연구를 거듭했다. 이는 기업의 실패는 기업가만의 불행이 아니라는 호암의 철학 때문이다.
호암은 1976년 서울경제신문 기고문을 통해 ‘부실 경영은 범죄행위’라고 강조한 바 있다. 기업 경영이 잘못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취업기회를 잃고 생계를 위협받는다는 설명이다.
이 외에도 호암은 삼성문화재단 설립, 성균관대 인수, 호암미술관 개관 등 사회 환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공존공영 철학을 지켜왔다. 올해로 34회를 맡는 삼성효행상 역시 국내 도의문화를 진작시키기 위해 호암이 직접 나서 제정한 국내 최대 효행 시상이다.
이처럼 민족과 인류에 대한 기업의 공헌을 강조한 호암의 경영철학은 1997년 호암재단이 발간한 ‘호암어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약 300 페이지 분량으로 이뤄진 이 책 가운데 사업보국과 공존공영과 관련된 호암의 어록은 50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경영과 직접적인 관련되지 않은 국가와 민족, 인류와 관련한 언급이 6분의 1에 달할 정도다.
이 가운데 호암의 경영철학을 가장 잘 나태내는 어록은 아래와 같다.
“자기만 잘살아보겠다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국가와 사회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기업이 있는 것이다. 국가관, 사회관이 없는 사람은 기업인이라고 할 수 없다.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 매점매석을 하는 장사꾼, 투기를 일삼는 사람, 사기행각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업가가 될 수 있겠는가? 돈만 벌겠다는 사람은 기업인이라 할 수 없다. 기업을 부실하게 만들어 국민경제에 피해를 주는 사람은 기업인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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