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크에서 타전된 삼성그룹 이건희 전 회장의 이 한마디는 이후 삼성의 경영 체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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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전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그룹) |
시간이 흐른 후 ‘프랑크푸르트 선언’, ‘신경영’이라고 불리는 이 선언은 당시 파격에 가까웠다. 그간의 계열사의 성과를 무시하고, 오히려 계열사들이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됐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뒀기 때문이다.
1992년 삼성은 영업이익 2300억원을 기록했다. 당시 물가 수준과 삼성그룹의 규모를 감안하면 이는 건실한 실적이었다.
대부분 계열사 역시 국내 1위에 올라있었다. 후발주자로 시작한 전자산업에서도 금성사(현 LG전자)와 대등하거나 오히려 한 발 앞선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삼성을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룹으로 진단했다. 영양실조·당뇨·선천적 불구·암 말기 등 이 전 회장은 국내 1위를 달리고 있는 계열사들에 대해 쓴 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선친인 이병철 선대회장 이후 줄곧 국내 최고 기업의 위상을 지켜온 삼성에 대해 후계자이자 당시 수장인 그가 쓴 소리를 퍼부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1988년 3월 이 전 회장의 ‘제2의 창업 선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변화와 개혁을 촉구했다. 질 경영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하지만 5년이 흐르도록 삼성의 혁신은 이뤄지지 않았다. 선대 회장 아래 그룹의 덩치가 커지면서 구성원들의 무사안일주의가 확산됐다. 삼성의 성장을 이끌었던 비서실의 비대화도 부작용을 낳았다.
당시 계열사들은 비서실의 감사를 넘어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도전보다는 현상 유지에 비중을 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시 생산직 계열사들은 지난해 대비 생산량과 매출액이 하락하지 않는 것에 집착했다. 시장 확대와 품질 개선은 뒷전이었다. 결국 성장 동력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알았다 해도 손을 쓸 수 없었다. 기존 삼성 그룹의 지분 90% 이상을 물려받았지만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삼성그룹의 지분 분할은 1995년에 마무리됐다. 회장 자리에 올랐지만 여전히 그의 위상은 선대 회장의 그것에 비하면 한 없이 작았다.
회장 취임 직후 자신의 사람들을 측근에 두는 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건희의 핵심 참모로 분류되는 이수빈 현 삼성생명 회장을 비서실장 자리에 선임된 것은 1990년 12월이다. 취임 이후 3년이 지나서다.
실질적인 이건희 친정체제는 1991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여전히 그룹 분할 문제가 마무리 되지 않았기에 운신의 폭에도 한계가 있었다. 선대회장의 경영 방식에 익숙한 조직원들이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앞두고 치밀하게 그룹 혁신을 위한 명분 쌓기에 들어간다. 그는 1993년 1월부터 6월까지 LA·도쿄·오사카·런던·후쿠오카 등 해외 10여 곳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점검했다. 사장 및 임직원들과의 마라톤 회의도 이어졌다.
해외에서 체감한 삼성의 위치는 상상 그 이하였다. 해외 현지 유통점에서 삼성의 제품은 한각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품 가격 역시 해외 업체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삼성 제품을 찾은 고객들은 거의 없었다. 이 전 회장은 삼성이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통감했다. ‘일등 삼성’은 국내에서만 통용됐다. 해외에서 삼성은 삼류에 불과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삼성 대수술에 들어간다. 수술의 첫 시작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이 선언에는 일본 출신인 후쿠다 삼성전자 고문의 보고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인 출신인 후쿠다는 기존 관리에 비해 삼성의 고질적인 문제를 비판적으로 진단할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후쿠다 보고서를 접한 이 전회장은 200명 상당의 삼성 주요 인사들을 곧바로 집합시켰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전 회장의 행보는 예전의 모습과 180도 달랐다. ‘은둔의 경영자’, ‘경청의 달인’으로 알려졌던 그가 끊임없는 강연에 나선 것.
하루 8시간 이상 지속된 강연과 토론은 40일 이상 지속됐다. 그룹 경영에 칼을 대기로 결심한 그의 행보는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대중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전과 달리 방송 출연과 대학 강의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내 조직 개편도 서둘렀다. 삼성 경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서실도 개편됐다. 그해 10월 이 전 회장은 비서실장에 현명관 사장(현 삼성물산 고문)을 선임했다. 삼성 공채 출신이 아닌 인사가 삼성 경영의 핵심 축으로 자리한 것.
이는 향후 삼성호(號) 체질개선의 시발점이 됐다. 순혈주의가 강했던 삼성에서 외부인사 중용을 통한 내부 경쟁 유도가 시작된 것이다. 이 전 회장의 주요 경영철학 가운데 하나인 ‘메기론’도 이때 시작됐다.
메기론은 메기를 미꾸라지 무리 속에 넣으면 미꾸라지들의 힘이 세지고 더 날렵해진다는 이치를 경영에 도입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효과는 1997년 IMF 당시까지 이어진다. 당시 삼성의 긴축재정은 2008년 하반기 글로벌 금융위기 그 이상이었다. 임직원 급여의 20%가 삭감됐다. 보너스도 지급되지 않았다. 구조조정 여파로 사업이 축소되고, 수많은 인재들을 잃어야 했다.
대우를 비롯한 주요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했다. 대기업들 역시 환란의 불똥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삼성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국내 1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는 4년 전 위기에 앞선 체질 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IMF 이전까지 국내 기업들은 장부상 수치 위주의 경영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삼성은 프랑크푸르트선언을 시작으로 양 위주의 경영에서 질 위주의 경영으로 변화를 꾀함으로써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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