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면은 유죄 판결 4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법원은 지난해 8월 이 전 회장에 대해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사건의 유죄를 확정,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했다.
정부가 이처럼 이례적이고 빠른 사면을 시행한 것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전 회장의 IOC 위원 복귀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경제 성장을 위해 삼성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요구도 있다. 삼성의 활발한 투자와 일자리 창출 독려 및 재계 기 살리기라는 복안도 있었다.
실제로 사면 이후 이 전 회장의 활동은 어느 때보다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외신들로부터 ‘은둔자적 황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 전 회장은 대외활동에 소극적이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를 제외하면 그는 베일에 가린 생활을 유지해왔다.
사면 열흘 뒤인 1월 10일 이 전 회장은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S’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식적으로는 전현직 IOC 위원을 전시회에 초청, 올림픽 유치 활동을 벌이기 위한 행보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삼성전자는 물론 경쟁사 부스를 직접 돌며 계열사 경영 챙기기에도 나섰다.
전시회에서 만난 취재진의 질문에도 적극적으로 답변했다. 올림픽 뿐 아니라 삼성 경영,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 까지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그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처럼 많은 의견을 전한 것은 2007년 1월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 ‘샌드위치론’을 언급한 이후 3년만이다.
CES에서 이 전 회장이 지적한 3D TV 전용 안경의 문제점은 바로 개선ㆍ생산됐다. 최근 삼성이 출시한 USB 충전 방식의 3D 전용 안경이 바로 그 것. 기존 배터리교환식 제품은 무게가 더 나가고, 배터리를 교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제품은 USB 충전 방식을 채택해 더욱 편리해졌다. 무게도 40% 가까이 줄었다.
과거 휴대폰 버튼 구조 변경, 반도체 회로 집적 방식 결정 등 제품의 세부적인 사안까지 직접 챙기고 결정하던 회장 당시의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CES 참관 하루 뒤인 1월 11일 삼성은 2015년까지 세종시에 총 2조5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전 회장 퇴진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삼성은 장기 계획 수립 대신 단기 경제 환경에 대응하는 시나리오 경영을 지속해왔다. 이처럼 큰 규모의 장기 프로젝트를 결정한 것은 이 전 회장 퇴진 이후 처음이다.
오랜 기간 준비했던 신수종 사업에 대한 본격 투자계획도 밝혔다.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장 김순택 부회장은 “삼성은 세종시에 △태양전지 △2차전지 △LED 조명 △헬스케어 등 주요 신수종 사업을 입주시킬 것”이라며 “삼성이 투자하는 신사업은 정부가 조성하고자 하는 국제과학 비즈니스 벨트와 연계해 국가의 미래 산업동력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귀국 후 이 전 회장은 선친인 이병철 선대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 참석한 뒤 잠시 휴식기간을 갖고 곧바로 밴쿠버로 향했다. IOC 위원직 복귀와 함께 평창 유치활동에 나선 것. 이 전 회장은 밴쿠버에서 열린 제122차 IOC 총회에 참석했다. 이 총회는 내년 7월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는 남아공 더반 총회 이전에 IOC 위원이 한 곳에서 만나는 마지막 자리다.
이와 함께 이 전 회장은 국내 밴쿠버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게 정부포상금의 50%를 개인적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금메달을 딴 이정수에게 IOC 위원 자격으로 메달을 수여했다. 국내 선수들의 선전이 이어지면서 이 전 회장의 활발한 IOC 위원 활동은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것은 이 전 회장의 오른팔인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전 전략기획실장)이 최근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전 부회장은 이 전 회장 사면 이전까지 외부에 모습을 노출하지 않아 왔다. 하지만 최근 이 전 회장을 수행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조만간 이 전 회장과 이 전 부회장의 경영 복귀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전 회장은 언론에 “(경영 복귀는) 아직 멀었다”, “생각중이다”, “회사가 약해지면 돕겠다”라는 원론에 가까운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사면 이후 이 전 회장은 다소 정체를 보였던 삼성의 공격 경영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투자는 더욱 활발해졌다.
향후 해외 투자에 치중하지 않겠느냐는 시각에 대해서도 삼성은 “신사업은 향후 국가의 기간산업이 될 것인 만큼 산업안보 차원에서 국내에 우선 투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상반기 그룹 대졸 공채도 3500명으로 크게 늘렸다. 지난해 상반기(2100명)에 비해 40% 가량 규모를 확대한 것.
현재 삼성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도 지난달 15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간담회에서 “올해 경영상황이 지속적으로 호전되면 투자와 고용을 더욱 더 과감하게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이 전 회장의 복귀 여부와 관계없이 삼성의 경영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 하지만 이 전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기에는 아직 젊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삼성을 이끌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마쓰시다 고노스케 마쓰시다전기 회장은 79세 나이에 은퇴했다. 교세라그룹 명예회장 이나모리 가즈오도 고령(77세)임에도 경영에 참여한다.
지난 20여 년 이 전 회장을 선장으로 앉힌 삼성호는 국내 1위에서 ‘월드 베스트’의 항로를 개척했다. 그리고 세계경제 질서가 요동치고 있는 최근 이 전회장의 경륜과 지혜, 창조경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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