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브리핑]상상 전문 최고 경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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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5-0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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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미래 컨설턴트인 롤프 옌센(Rolf Jensen)은 "21세기는 이야기의 시대다"라고 했다. 기업들에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뻔한 제품 대신 꿈과 멋진 이야기를 팔아라"라고 충고했다. 2000년 출간된 '드림소사이티(Dream Society)'라는 책에서다.

이 책에서 옌센은 우리가 맞이 하게 될 '미래의 직함'을 제시했는데 아직은 황당하게 들리지만 "어, 그래?"하게 만드는 대목도 있다. '마음과 기분 담당 이사' '가상현실 전도사' '신선함 담당 부사장' '지적자본 담당 이사' '핵심가치관 부장' '이야기꾼 실무자' '상상(想像) 전문 최고경영자(Chief Imagenation Officer) 등이다.

이 중에서 '상상 전문 최고경영자'를 실제로 만나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두 달여 전 고등학교 동기회 자리에서 만난 한 친구가 불쑥 명함을 내미는데 직함이 세상에, '상상 전문 최고경영자'였다. 듣도 보도 못한 직함이라 눈을 씻고 다시 보며 물었다. "아니 이게 뭐하는 직함이지?"

동기는 그저 애매하게 웃었다. 명함을 자세히 뜯어보니 주택이나 상가 등을 지어서 파는 부동산 개발 전문 회사다. "아!" 뭔가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부동산 개발에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거 말 된다, 실감났다. 설령 팔아 먹기 위한 수작(마케팅 효과)일지언정 '상상 전문 최고경영자'라는 직함을 상상한 그 회사의 아이디어가 참으로 기특하게 생각돼 웃음이 터졌다. 그 친구도 낄낄낄 따라 웃었다. "쟤네 왜 저래?" 의아해서 쳐다보던 다른 동창들도 그 이상한 직함을 발표해 주자 '하하하' 따라 웃었다.

곰곰 생각해보면 웃을 일만은 아닌 게 오늘날 부동산 개발의 현실이 한심하고 참담한 수준이라서다. 건축법이나 주택법 규정에 얽매인 설계, 원가 절감에 목멘 불량 자재 사용과 날림 공사, 콘크리트 성냥곽 같은 획일적인 모양새 등.

아파트 건설의 역사가 50년이나 되고 두바이에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층 빌딩 공사를 도맡은 자랑스런 업적에도 아직 우리나라 부동산 개발의 수준은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한마디로 상상력이 없다. 뭔가 정감이 흐르는 스토리텔링은 고사하고 싸구려 마감 공사의 흔적마저 여기 저기 남아 있는 건물이 흔하다. '어반시티(Urban City)'처럼 나름대로 컨셉과 스토리텔링을 입힌 건물도 가끔 눈에 띄지만 문제는 주변 경관과 어긋나 외려 이상해 보인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대단한 스토리텔링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건설된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를 구경하노라면 부동산 개발에 대한 환상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해 달 별 은하로 이름 붙여진 네 개의 격자형 건물인 대형 쇼핑몰은 분양한 지 5년여가 넘었는데도 거의 텅텅 비어 황량하고 쓸쓸한 바람만 드나들고 있다. 1989년부터 출판 문화사업의 국제적 기지를 조성한다는 국가적 프로젝트로 시작돼 17년 동안이나 기획한 출판단지의 중심에 있는 대형 상가가 그 모양이다.

그 주변 국내 유명 건설회사가 지어놓은 고급 전원주택 단지의 쇠락은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한 바퀴 돌아보니 역시 텅텅 비었다. 단지 어귀에 있는 유일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들러 물어 보니 "사람들이 다 살고 있는 집이고 6~7억 원에 거래도 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설령 사람들이 다 살고 있다 하더라도 고풍스럽기는 커녕 낡은 티마저 나는 이런 집을 매수하는 사람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유럽 중소 도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지붕의 모양새, 꽃과 나무 길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성한 골목, 지하부터 지상 2층까지 2세대는 넉넉히 살만한 공간 효율성 등 나름대로 애쓴 흔적은 엿보였다. 하지만 왠지 밀려드는 '짝퉁의 느낌'(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산 자재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은 어쩔 수 없었고 한 채라도 더 짓겠다는 의도인 듯 동간 거리도 너무 가까워 보였다. '돈 벌겠다'는 의지가 더 앞섰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울이라는 메크로폴리스에 리모델링 바람이 불고 있다. 광화문에서 종로, 동대문 길, 을지로 길, 용산과 한남동 주변의 낡은 건물들을 헐고 문화적 감성이 느껴지는 스토리텔링 공간으로 재창조하겠다는 의지다. 당연히 멋지고 좋은 일이다. 서울이 교통 지옥, 콘크리트 감옥, 미움과 갈등의 터전이 되지 않기 위한 거의 마지막 묘수이다.

도심지 부동산 개발에서 '상상력'은 기획이나 설계 단계에서만 잠시 필요한 인스탄트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민과의 의사소통, 인적자원 선발과 자재 공급 및 사용, 주변 경관과의 조화, 마감 공사의 감리 등 모든 영역에 구체적으로 발휘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이상한 공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알고보면 부동산 개발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겉으로만 발휘된 상상력의 부작용 사례들이 적지 않다. 더 구체적이고 힘 있는 '상상'이 필요하다. 기업이나 정부 조직을 막론하고 각 분야에 '상상 전문 최고 경영자(CIO)' 직함이 더 많이 생겨나야 할 이유이다.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 아주경제신문 글로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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