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2-1] 현대, 첫 발 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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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6-0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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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과 6·25 동란의 시대의 시련과 극복

‘복흥상회’를 정리하고 새 사업을 찾던 정주영은 1940년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연다. 두 평 남짓한 이 공장은 현대그룹의 출발점. 하지만 이후 현대가 걸 어 온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숱한 위기의 연속이었다.

태평양 전쟁과 해방, 6.25 동란과 휴전 그리고 사회 혼란은 현대 뿐 아니라 그 시대 모든 사람에 크나 큰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기회의 실마리도 있었다.

정주영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위기 속에서도 성공의 기회를 발견했다. 또 이를 통해 세계 굴지의 그룹으로 현대를 키워 냈다. 현대의 DNA는 무엇이 달랐을까. 또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편집자 주>

   
 
6.25 동란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돌아온 1953년, 장충동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 정주영(뒷줄 오른쪽 첫번째)은 전쟁통에 미군의 각종 공사를 도맡으며 회사의 기반을 잡아가고 있었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정주영 회장은 1940년 자동차 정비사업에 뛰어들었다. 경일상회를 정리하고 고향에 돌아간 지 4개월 만이었다.

경일상회를 운영할 때 단골이었던 이을학은 정주영에게 자동차 정비가 큰 돈 안 들이고 목돈을 벌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을학은 당시 서울에서 최대의 자동차 정비공장인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이었다.

당시 500원 밖에 없던 정주영은 역시 경일상회의 단골이었던 오윤근 영감에게 3000원을 빌리는 등 자본금 5000원을 모았다. 그리고 1940년 2월 1일 서울 아현동에 자동차 정비 공장 ‘아도서비스’를 연다.

◆‘현대의 모태’ 아도서비스의 탄생

   
 
1953년 정주영 부부 사진. 정주영은 22세에 16세였던 동향이었던 변중석을 아내로 맞이한다. 변중석은 결혼 후 평생을 정주영 곁에서 말없이 근검 절약해 존경받았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아도서비스 설립 당시, 한국에는 약 5000여 대의 차량이 있었다. 아직은 소가 끄는 달구지나 인력거가 더 많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정주영은 곧 차가 늘어날 것이란 것 을 예감했다.

실제 한국 내 자동차 운행 대수는 1945년 해방 당시 7300여 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는 1만4000여 대로 8년 사이에 세 배 가까이 늘었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1997년, 마침내 1000만 자동차 시대를 맞게 된다. 60여년 만에 무려 2000배가 늘어난 것이다.

정주영은 당시 자동차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돈 되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그는 이후에도 돈 되는 사업을 발굴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하지만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공장을 연 지 며칠 안 돼 화재가 났다. 공장은 물론, 손님이 맡겨 둔 GM의 고급 세단 ‘올즈모빌’1대와 트럭 4대가 타버렸다.

정주영은 별 수 없이 3000원을 빌렸던 오윤근 영감을 또다시 찾아가 3500원을 더 빌렸고, 신설동에 두 평 남짓한 정비소와 대장간 하나만으로 영업을 재개한다.

이후 3년 동안 정주영은 하루 24시간 직원과 똑같이 먹고 자며 일했다. 장사가 잘 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남들보다 더 빨리 고쳐준다는 데 손님이 적을 리 없었다.

오윤근 영감에게 빌린 6500원을 이자까지 깨끗하게 갚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비소 사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43년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 조선총독부는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기업정비령을 내렸고, 정주영은 공장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다시 모은 돈 1만원을 투자해 트럭 30대로 광석 운반 하청 일을 시작했으나, 그마저 2년 반만에 접었다. 친구에게 사업을 넘기려는 광산 제련소 소장의 트집 때문이었다. 그때가 1945년 5월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정주영이 사업을 접은 뒤 3개월 후인 그 해 8월 한반도가 해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3개월만 더 있었다면 그는 그 동안 모은 돈 5만원은  물론 그 동안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을 뻔 했다.

◆첫 발 내딛은 현대… 그리고 6·25

   
 
1948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직원과의 야유회 모습. 정주영은 해방 직후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현대’라는 상호가 쓰인 첫 회사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정주영은 1946년 4월 서울 중구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현대라는 상호명의 첫 등장이다. 정주영 나이 31살 때다. 공업사는 먼저 미국 병기청에서 자 동차 엔진을 바꿔 다는 일로 시작했다.

이후 고물 일본자동차 개조 사업에도 나섰다. 1.5t 트럭 중간을 이어붙여 2.5t으로 만드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5월, 현대의 규모를 비약적으로 키워 줄 새로운 사업을 찾게 된다. 바로 토건(건설)업이다.

정주영은 자서전을 통해 “수리 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똑같이 일하고 수십 배의 공사비를 받아가는 건설업자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곧바로 ‘현대토건사’ 간판을 새로 단 정주영은 3000여 개의 토건사가 난립한 가운데 설립 첫 해 1530만 환의 계약을 기록하며 회사 규모를 키웠다. 관련 경험도 차츰  쌓여 갔다.

정주영은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중구 필동에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차렸다. 본격적으로 현대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격동 속에서 정주영의 시련도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출범 5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정주영은 사업을 뒤로 하고 동생 정인영과 함께 부산까지 피난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통에 회사를 비약적으로 키울 기회를 만난다. 정인영이 미군 사령부에 통역관에 채용된 것을 계기로, 정주영이 미군 공병대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정주영은 미군 부대가 묶을 숙소 건설을 시작으로, 아이젠하워 장군 방문을 위한 사옥 개조, UN군 묘지 조경공사 등 미군 공사를 도맡게 된다.

UN군 묘지 조경공사 때는 한겨울이라 잔디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임시방편으로 보리밭을 통째로 떠 와 잔디처럼 보이게 했다는 정 회장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 때 맺은 정주영과 미군의 관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현대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다. 공사를 도맡았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이 때 도움을 준 메카리스트 중위를 후일  현대건설 미국 지점에 취직시켜 주기도 한다.

◆‘위기 뒤 기회’ 찾아나선 현대건설

   
 
1957년, 현대건설에 의해 다시 개통된 한강 인도교 모습. 이 공사는 현대건설에 고령교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 땅에 있었던 기간시설은 대부분 파괴됐다. 교량만 해도 1466개가 파괴됐다. 이에 현대건설은 미군 사업 정부의 복구 사업에 본격 뛰어든다.

첫 수주 사업이었던 1953년 고령교 복구 작업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2년에 걸친 공사로 현대는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 1년 사이 120배가 뛰어 버린 물가가 가장 큰 타격 이었다.

정주영은 회사 간부 및 동생들의 집을 다 팔고 간신히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공사 마감은 계약 기간보다 2개월이 늦었다. 금액도 계약한 5457만환을 훌쩍 넘긴 1억 2000만환이었다.

정주영은 그때 생긴 빚 6500만환을 갚는 데 꼬박 20년이 걸렸다. 하지만 정주영은 당시 “이것은 시련일 뿐 실패가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했고 곧바로 재기의 발 판을 마련하게 된다.

1957년, 4650만환 규모의 인도교 공사에서는 40% 이상의 수익을 내며 고령교의 실패를 만회했다. 이와 함께 한국 5대 건설사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후에도 미군 및 정부 발주 공사를 잇달아 수주하며 1960년 마침내 국내 도급 순위 1위의 건설사에 오른다.

국내에 경쟁 상대가 없어진 현대건설은 1960년대부터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다. 또 한국 경제발전의 상징인 경부고속도로와 울산의 현대조선소도 이때 건설하게 된다.

물론 이 같은 사업은 앞서 수많은 시련을 거치며 단련된 현대가의 DNA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부에 계속)

(아주경제 특별취재팀=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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