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학교 다닐 때 ‘소설창작론’ 시간에 무척이나 불량기 만발한 젊은 교수님께서 하신 한마디가 여행 다닐 때 단편소설만은 꼭꼭 챙기는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그 말인즉 “좋은 단편은 인생의 한 단면을 쓱 베어놓은 섬뜩한 인생살이의 단면도 같다.”는 말. 여행도 일면 단편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은 그 의외의 불확실성과 정해진 시간들, 그리고 살면서 느끼는 도도한 허무로의 집착에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 등등.
한창 세상에 대해서 문학연(文學然)하던 10대에는 체홉과 투르게네프, 카프카에 쏙 빠져 세상은 왠지 원래부터 애매하고 모순에 가득 찬 혼돈의 연속인 것처럼 느끼곤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유의 교훈으로 결말을 짓는 작가들의 음흉한(?) 세상과의 타협이 늘 못마땅하곤 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한 잡지의 인터뷰를 위해 만난 마음산책의 대표로부터 건네받은 한 권의 책에 그야말로 ‘아, 정말 미치게 가슴을 베는 듯한 서늘한 충격’에 빠져 꼼꼼히 한 자 한 자 꼭꼭 씹어 먹듯이 읽은 책이 이 책이었다. 제임스 설터의 명단편집 『어젯밤』!
『어젯밤』에는 우리네 인생사의 자질구레한 부조리와 모순이 짐짓 점잔을 빼며 아닌 체하는 미국 중산층 소시민들의 비뚤어진 욕망 속에서 한 꺼풀 한 꺼풀 제 속을 드러내는 위악적인 이야기들로 펼쳐져 시종일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설터가 그린 인간의 본질은 마치 사는 게 다 그렇게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좀스러운 부유(浮游)하는 절망과도 같다는 듯이 뭐 하나 제대로 바람직한(?) 결과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없다. 한마디로 혼돈스럽고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모습이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섬찟한 상황으로 다가와 괜스레 숨기고 싶고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옴짝달싹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실망스런 현실과 맞딱뜨리게 된다.
『어젯밤』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사람들은 주로 미국 중산층의 연인과 부부들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애써 감추고 있는 성적 욕망과 탐닉, 위악(僞惡)한 일상의 모순들이 때로는 가슴 속에서 몸서리쳐지고, 때로는 가슴밖에 나와 서로를 후벼 판다. 소설 속 사건들은 때로 생을 지배하는 중요한 기억이기도 하지만 대개 뼈저린 후회로 남는다.
「나의 주인, 당신」에서는 예술적 광기에 사로잡힌 시인에게 빠져든 여주인공이 일탈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지만,「플라자 호텔」에서 남주인공은 옛 연인과 재회한 후 허망함을 느낄 뿐이다. 헤어진 두 남녀의 대화가 기묘한 긴장감 속에 이어지는 「방콕」에서도 이들의 사랑은 강렬한 추억일 뿐이고 현재의 삶은 각자의 몫이다. 젊고 아름다운 정부에게 반한 남자의 이야기 「귀고리」에서도 관계의 말로는 씁쓸하다. 그럼에도 소설 속 모든 인물은 끊임없이 무모한 열정에 사로잡히며 상대에게 매혹당한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들은 대개 배신으로 점철된 놀라운 결말을 담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넘어지고 빠져들고 죄로 유혹하고 자신들도 어느 순간 죄를 짓는다. 「포기」에서 아내의 생일날 밝혀지는 남편의 배신―한집에 사는 친구이자 시인인 데스와의 사랑―은 충격적이다. 가장 극적인 배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어젯밤」이다. 병든 아내를 안락사시킨 뒤 남편이 벌이는 행각, 이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다음날 아침 버젓이 살아나 ‘다시 시작하자’는 대목에선 잔인하고 불안정한 운명의 불가사의함에 독자들을 아연실색케 한다.
단편소설은 한 편 한 편이 잘 직조된 인생의 축소판이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소설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작가의 의미심장한 메타포들이 시종일관 꾸미지 않은 인생의 무대로 독자들을 끊임없이 긴장케 한다. 10편의 단편엔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배신과 터지기 일보직전의 발화점에 돌입한 파국의 일상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독자들을 윽박지른다. 설터는 때로 이런 삶의 비밀스런 자국을 고해성사하듯이 상징적으로 뇌까린다.
“그녀는 열다섯이었고 그는 매일 아침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그때는 그게 삶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삶을 망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42쪽, 「스타의 눈」에서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169쪽, 「어젯밤」에서
최소한 산다는 것이 너무 매끄럽고 희망으로만 가득 찬 이상향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설터의 불편하고 안쓰러운 단편소설은 우리들에게 정직한 위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횡행하는 낯설고 불편한 순간순간이 거부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의 실체라면 우리가 목도하는 설티의 불안하고 낯선 삶의 비의(悲意)도 때로는 우리들을 정직한 삶의 이면(裏面)을 바라보도록 유혹하는 순진한 고해성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던 설터의 시선이 훑고 간 그 자리가 우리네 인생의 진솔한 사랑과 정욕, 두려움과 회한의 쓸쓸한 흔적일지라도 그 또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어쩔 수 없는 인생의 그림자인 것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