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로벌시대의 <문화>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글로벌시대> 혹은 <문화시대>라고도 부르고 있다. 불과 이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세계화, 지구촌, 글로벌리즘, 글로벌시대란 용어가 일반화되었고, 동시에 문화산업, 문화콘텐츠, 문화시대 등 새로운 개념의 문화란 용어도 자주 듣게 되었다. 그렇다면 글로벌시대, 문화시대란 어떤 의미인가? 글로벌시대와 문화시대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먼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문화라는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문화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인지(人智)가 깨어 세상이 열리고 생활이 보다 편리하게 되는 일. 철학에서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진보 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 또는 그에 따른 정신적 물질적 성과를 이르는 말,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따위. 문덕(文德)으로 백성을 가르쳐 이끎”[동아 새국어대사전]으로 나와있다. 그리고 비슷한 용어인 문명에 대해서는 “인지가 발달하여 인간생활이 풍부하고 편리해진 상태. 정신문화에 대해서, 주로 인간의 외면적인 생할 조건이나 질서에 대한 물질 문화를 가르킨다. 문화와 비슷하고 미개, 야만과 반대” 개념으로 나와있다.
자연상태를 벗어나 향상되고 발달되었다는 의미에서 문화와 문명은 서로 비슷하지만, 문화는 문화인, 문화민족, 문화생활 등의 용어처럼 정신적 예술적인 측면을 중시하고, 한편으로 문명은 문명개화, 문명의 이기 등처럼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서로 구별하여 사용하여 왔다. 나아가 문화는 선거문화, 성문화, 음식문화, 조선시대문화, 양반문화, 겐로쿠(元禄)문화, 조닌(町人)문화, 귀족문화, 일본문화, 한국문화, 섬문화처럼 폭넓게 써왔는데, 이는 특정 분야, 특정 계층, 특정 시기, 특정 지역 등에서만 통용된다는 한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화의 주체가 특정 민족이나 계층이라는 점에서 보면, 문화는 기본적으로 특정 민족이나 계층에서만 통용되는 민족적, 계층적, 지역적, 폐쇄적이며 초합리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 세계4대 문명의 발상지처럼 각기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만들어낸 도시적이고 범지역적으로 통용되는 초민족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문화, 청나라문화, 사무라이문화, 한국문화, 일본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문명, 청나라문명, 사무라이문명, 한국문명, 일본문명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렇게 민족적 성향이 강한 초합리적인 문화와는 개념이 다른, 보편성을 지닌 세계문화, 인류문화 혹은 문화시대란 용어를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신개념은 어떻게 형성돼 나온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그 전까지 당연시되었던 국가나 민족 중심의 세계관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인간사회의 역사를 국경이나 인종의 경계를 뛰어넘어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투쟁으로 본 마르크스주의의 등장, 교통・통신의 비약적 발달, 그리고 국가간의 연합과 동맹에 의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충격, 그 후 인공위성 발사와 우주개발 등의 과정을 거치며, 그 동안 국가 단위로 혹은 인종으로 구분되어진 지구상의 인간을 하나의 개체, 즉 “인류(人類)”로 파악하려는 인식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더욱이 20세기말에 일어난 베를린 장벽 붕괴, 소련 해체 등에 의한 이데올로기 대립 시대의 종언, 지구 온난화와 라니냐(li Niña)·엘니뇨의 영향 등과 같은 지구적 레벨의 환경 인식, 그리고 사상과 국경을 뛰어넘는 경제의 급속한 글로벌화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는 인식에 일대전환을 초래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등의 전영역에서 지구가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글로벌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구를 인류라는 인간의 종(種)이 살아가는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됨에 따라 문화 개념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다. 기존의 민족적, 폐쇄적, 초합리적인 성격이 강한 문화에서, 이러한 한정된 범위에서 벗어나 인류적이고 지구적인 보편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즉 인류문화, 세계문화, 글로벌문화라는 용어로 그 의미가 확대되어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각국은 인류문화 지향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자국문화 중에서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합리성을 찾아내어 세계화시켜 나가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자국문화의 발달과 전파는 그대로 경제 효과와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만큼, 21세기에 있어서 각국의 생존과 번영을 결정짓는 키는 문화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글로벌시대의 일국 문화를 넒은 의미로 정의한다면, 특정 국가(민족)가 주체가 되어 행하는 모든 활동, 즉 일상생활에서부터 가치체계・상상체계에 기반한 정신활동, 나아가 경제・정치・사회활동과 그 활동의 소산으로, 인류문화에로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현재는 글로벌시대임과 동시에 문화시대인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이러한 거시적인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현실은 엄연히 국가나 민족을 단위로 하여 움직이고 있고, 또 지역권, 문화권이라는 틀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로벌리즘을 인정하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는 국가실리주의 나아가 지역권간 대립이라는 냉혹한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인류문화만을 보고 이와 다른 지역문화권 혹은 민족 문화와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히려 세계는 지역권별로 국가간 연합 혹은 지역공동체 형성이라는 추세 속에서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유럽연합(EU, 1994),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1994), 아세안+3(ASEAN+3, 1997), 아프리카연합(AU, 2002), 남미국가연합(UNASUR, 2008)의 결성 등은 이러한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국가간 자유무역협정(FTA), 경제연대협정(EFA)의 논의와 활발한 체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국가・지역권・세계라는 세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는 시각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가 된 것이다.
한편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1991년 소비에트 해체로 냉전체제가 급격히 무너지고, 이후 급속한 글로벌화의 진행 과정에서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자리잡게 된다. 미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구축을 꾀하였고, 각국은 싫든좋든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여야 했다. 동아시아에서 영어 학습 열풍이 불듯이,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현상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 경제의 중심지인 윌가에서 발생한 리먼쇼크(Lehman Shock)는 한순간에 전세계를 금융 위기로 몰아넣었다. 미국은 국내경제 문제 해결에 급급하였고, 미국의 힘만으로 세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드러났다. 그동안 세계 흐름을 선도해온 서구 선진국 중심의 G7도 이번 세계경제위기에 부딪쳐서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세계경제위기 속에서도 성장하는 중국이 급부상하게 된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에서 더 나아가 세계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번 세계 경제위기를 계기로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미중)시대가 개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세계경제에서 주요 신흥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짐에 따라 G7에 대신한 새로운 대안으로 G20(Group of 20, 금융 세계경제에 관한 수뇌회담)이 세계정상회담으로서 대두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G20은 전세계 총생산의 90%를 차지하는데, 그 중에서 아시아 국가의 약진이 눈에 두드러진다. G20 제국 중에 아시아 국가가 7개국(한국,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터키, 사우디아라비아)이고,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가맹국으로 따지면 절반에 가까운 9개국이 된다. 더불어 한국, 중국, 일본이 참가한 ASEAN+3가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권은 EU나 NAFTA의 4배 이상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고, 이미 GDP 합계는 유로존을 능가하고 있으며, 생산량, 무역량, 발전가능성의 측면에서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아시아 각국의 성장에 따라, 지금까지 근대 200년 동안 세계인구 약 12%의 유럽과 약 4%의 미국이 약 60%의 아시아 운명을 좌우했던 시대가 종언을 맞이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바마 미대통령도 2009년 11월 14일 도쿄 방문 연설에서 미국이 아시아태평양국가의 일원임을 강조하였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동안 이룩해낸 한국의 발전과 중국의 급성장, 그리고 경제대국인 일본이 연결된 한중일 삼국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며, 글로벌화 과정에서 세계 경제의 중심축으로서 한중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위상이 중시되는 이른바 <동아시아중심시대>가 실질적으로 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를 중시하는 움직임은 지역권 내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인 해석은 별도로 치더라도, 하토야마(鳩山) 수상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에 대한 발의는 그동안 서구지향적이었던 일본이 얼마나 변화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아직 하토야마수상의 동아시아공동체는 그 알맹이와 의도가 명확하지 않지만, 메이지시기에 제창되어 근대 일본 속에 내재된 탈아론(脱亜論)이 백수십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커다란 방향전환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일본의 모색이 어떠한 결실로 드러날지는 미지수지만, 종래와는 다른 레벨에서 아시아 중시가 일본 국내에서도 대세를 이룰 것이라 예측된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를 둘러싼 내외의 추세를 고려하면, 이미 동아시아중심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되기 싶지만, 그러나 아직은 불완전한 형태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그 중핵을 이루는 한중일 삼국만을 살펴보더라도, 글로벌시대 혹은 동아시아중심시대에 걸맞는 삼국간의 구조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며, 여전히 기존의 문제나 갈등요소가 미해결된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ASEAN, ASEAN+3, ASEAN+6, APEC 등의 지역협력체제 구축 방안이 난립해있는 가운데, 한중일은 미국과의 관계, FTA 체결 문제 등은 차치하더라도, 영토문제, 역사문제 등이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중심시대를 향한 한중일의 공통 비전이나 가치관 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보다는, 각국의 입장에 따른 정치 경제적 논의만이 무성할 따름이다.
흔히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을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으로 지칭해 왔는데, 과연 현재도 이러한 하나의 문화권 개념이 타당하고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한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한중일의 공통된 표기 수단으로서 한자는 제기능을 못하고 있고 영어로 대치되고 있다. 또한 오늘날은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유교적 가치관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오늘날 한중일 삼국은 하나의 지역문화권으로 분류되면서도 실제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사회로 변모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글로벌시대, 동아시아중심시대의 한중일 삼국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글로벌시대에 인류 차원으로 확장된 새로운 문화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한중일 삼국의 관련양상을 검토해보자 하는데, 본고의 목적이 있다. <문화>의 시각으로 한중일 삼국의 관련양상을 크게 전근대・근대・탈근대로 삼분하여 통시적 공시적으로 고찰해봄으로써 향후 전망을 해보고자 한다.
2. 전근대 한중일 삼국의 관련양상
크게 보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중심국은 중국이었다. 중국의 문화는 우월한 입장에 서서 한국이나 일본에 전파되었고 수용되었다. 동아시아를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이라 부르는 것도 그동안 중국문화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언어와 민족이 다르고 수 천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이나 일본이 중국문화에 의해완전 잠식당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중국문화에 반발하여 자국의 전통문화와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중국의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자국 상황에 맞게 소화, 흡수하면서 한일양국은 각자의 특색을 지닌 문화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한 위에서 전근대 한중일의 교류양상을 본다면, 중심국 문화의 전파나 수용 정도는 중심국과의 거리나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고, 더욱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지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중국에 대해 한국과 일본은 차이가 생긴다. 즉 중국을 <중심>이라 한다면, 중국과 육로 및 연안으로 직접 연결된 한국은 <주변>, 그리고 바다를 경계로 떨어진 일본을 <외곽>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일본열도를 둘러싼 바다는 오랫동안 인적 물적인 교류에 커다란 장애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삼분론적인 인식에 의하면, 그동안 중국을 <중심>, 한국과 일본을 일률적으로 <주변>으로 보는 이분론적인 인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한국과 일본과의 차이가 드러나, 한중일 삼국의 관련양상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중심을 중국, 주변을 한국, 외곽을 일본으로 설정하여 문화전파의 순서를 보면, 중심에서 성립된 문화는 주변으로 다시 외곽순으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이 중심에서 주변을 거쳐서 ― 혹은 주변국가의 소화과정을 거쳐서 ― 외곽으로 진행되었든, 중심에서 외곽으로 직접 전파되었든 간에 시간 순서도 중심→주변→외곽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삼국을 문화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어디까지나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우월의식을 갖고 주변을 인식하는 문화를 구축하였다. 한족(漢族)의 중화주의 인식에 따라 중국을 둘러싼 사방의 제민족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벌(北狄)이라는 야만인으로 지칭되었다. 인접한 한국의 경우는, 중심국 문화를 시기적으로 약간 늦거나 거의 동시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발달한 중심국 문화에 대한 동경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중심국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여 중심국 문화와 자국문화를 동일시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자연히 한반도를 통하여 전파되거나 시기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본문화에 대하여서는, 중심국이 그랬던 것처럼 우월한 입장에 서서 경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나 일본에 대한 왜(倭)라는 호칭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심에 대한 동경과 외곽에 대한 경시는 더욱 심화되어 훗날 소중화(小中華)의식까지 낳았던 것이다.
한편 외곽에 위치한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국보다 뛰어난 중심국의 선진 문화나 중심에 가까운 주변국의 문화에 대해 동경을 갖게 되지만, 지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중심국 문화를 수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 들어온 문화는 소중히 보호 유지된다. 또한 동아시아지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일본은 유입된 대륙의 문화를 또다시 전파할 곳이 없기 때문에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유라시아대륙의 문화전파의 종착역과 같았다. 따라서 한 번 전파된 문화는 일본열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중층적인 문화구조를 이루게 된다. 중심국 문화에 대한 동경은 유입된 문화의 유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심국 문화를 모방 소화하여 독자의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산물이 중국을 본 떠 만든 일본의 연호(年號)나 천황제이며, 때로는 그러한 입장에서 정치적으로는 중심국인양 주변국을 멸시하는 이중적인 인식이 생기게 된다. 고대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반도문화에 대한 동경이라는 문화수용 태도와는 반대로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우월의식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전근대 한중일 삼국은 중심, 주변, 외곽의 특성을 지닌 채로 각기 다른 입장에 서있으면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도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하는 질서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중국의 선진 제도를 수용 모방하였고, 특히 문화적으로는 중국에서 ―드물게는 중국을 통해― 발신된 문자(한문), 종교(유교, 불교, 도교), 예술(회화, 서예, 음악) 등을 공유하며 자국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상의 관련양상을 도표로 나타내면 [표1]과 같다.
그렇지만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권은 중국이 당나라였을 때처럼 순탄하게 진행되어 온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대륙이 한족 이외의 민족, 예를 들어 몽고족, 만주족에 의해 지배당하는 원나라와 청나라의 경우에는 기존의 틀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몽고족의 한반도 침략에 대항한 고려의 대몽항쟁, 그 후 몽고에 굴복한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대규모 일본 침공은, 그 동안 한 번도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일본열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민족의식이 크게 자극 받았으며, 기존의 동아시아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비록 원나라에 의해 한 때 동아시아 세계가 요동치기는 하였지만, 명나라의 등장으로 또다시 강력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구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명나라 국력이 약화되는 16세기 후반 대항해시대의 흐름을 타고 서양세력이 동아시아에 나타난다. 제1차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부를 수 있는 서양세력과의 접촉에 대해, 한중일 삼국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어디까지나 중심국이었던 중국은 서양문명에 대해서 매우 둔감하게 반응하며 무시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주변국 조선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조선은 중국 이외의 국제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러한 결과는 국제사회에 대한 무지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한편 외곽에 위치한 일본은 외부세력과의 접촉에 대하여 중국이나 조선과는 달리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등 선교사의 포교 활동을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서양문명을 수용하려 하였고, 그때 유입된 조총이 전국(戰國)시대의 양상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하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혼노지(本能寺)에서 사망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노부나가의 위업을 계승하여 완전 통일을 이루는데, 이 통일 과정에서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한 히데요시는 통일을 이루자마자, 바로 이 조총부대를 내세워 조선을 침략하였던 것이다. 침략의 목표는 중국이었지만, 결국 임진왜란은 조선에서조차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한 채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끝이 나고, 오히려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킨 역사적인 사쳌쳌쳌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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