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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100년 DNA 6-2] “나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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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7-15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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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영이 대선에 뛰어든 이유

   
 
 
정주영은 왜 정치에 입문했을까.

당시 언론들은 재계 최고 거물 인사의 ‘놀라운 변신극’을 놓고 그 이유에 대해 각종 추측을 내놨다. 1992년 12월호 월간중앙은 “1년 전만 하더라도 정상급 재벌보스로서 희수연을 지척에 둔 정주영씨가 대통령이란 정상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며 “당선된다면 파천황(破天荒)의 대변신극이 되는 셈”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언론들은 그 이유에 대해 △정부에 미움을 사 당하고만 있는 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승부사적 기질의 발로 △재벌을 넘어서 정치까지 삼키려는 무모한 배포 △순수한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구국운동의 일환이라는 3가지 가능성을 내놨다.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전두환·노태우의 12년 군사정권 때 애써 키워 놓은 중장비제조업체 창원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빼앗기는 등 정권과 마찰을 빚어 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부고속도로 같은 대사업을 함께 추진했던 때와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또 이는 현대그룹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당선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봤다. 현대그룹과 그 협력사 직원의 가족만 따져도 150만명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창당 2개월 만에 대선 직전 총선에서 357만표를 얻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했다. 여기에 실향민·반양김(反兩金) 유권자의 표를 합하면 당선권인 550만표를 얻는다는 계획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하지만 평소 정주영의 평소 성향과 당시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대권 도전은 개인적인 영리나 욕심보다는 세번째 이유, 즉 순수한 의도였으리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정주영은 밑지는 장사를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이윤만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을 고수해 왔다. 오히려 앞뒤 재지 않는 솔직함이 때론 정권의 미움을 샀다. 전경련 회장 당시 5공 정권의 사퇴 압박에 “경제단체가 정권의 입맛에 맞춰줄 순 없다”는 이유로 회장직을 고수했다. 거기에 “정부는 정부가 할 일을 해야 한다. 기업에 간섭해선 안 된다”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는 12.12 쿠데타로 계엄령이 내려지며 말 한마디에 그룹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는 살벌한 때였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 같은 그의 행보는 ‘영악해야 당선되는’ 대권 도전에서 오히려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기성 정치인과는 달리 너무 솔직했던 게 탈이다. 지나치듯 한 말은 당시 여당을 지지하던 각종 언론의 뭇매를 맞았고, 이는 곧 그의 주요한 패인으로 작용했다.

   
 
 1992년 대선 후보 시절 정주영이 아이들에 둘러싸여 활짝 웃고 있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1974년부터 1988년까지 15년 동안 정주영 회장을 보좌했던 박정웅 전 전경련 상무는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12년 신군부정권은 자유시장 경제 원칙과 무관하게 정부가 민간 경제계 위에 군림하던 시기였다”며 “정 회장은 이 같은 부조리를 절실하게 체험한 뒤 자신이 어떤 기성 정치인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서산간척지 소장 때부터 1996년 소떼 방북 총책임까지 그의 최측근에 있었던 강영락 전 현대건설 이사 역시 “(정주영의 정계 진출에 대해) 당시 온갖 말들이 많았지만 이는 대부분 억측에 불과했다”며 “그는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평생 일관됐던 사람이었고 (대권 도전도)이를 그대로 실행한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정주영의 대권 도전 후 그와 현대건설은 숱한 고초를 겪었다. 그는 물론 현대건설 측근들은 선거 비자금 조성 등 이유로 각종 조사를 받았고 사업 역시 일정 부분 타격을 입었다. 이번 도전은 완전한 실패였다. 하지만 그 후 한국의 상황을 보면 그의 대권 실패는 비단 그만의 실패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주영은 1996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해 ‘외채’라고 말했다. 한국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외채로 인해 IMF 관리 하에 들어가기 정확히 1년 전이었다. IMF 시대는 우리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그의 대권 도전이 성공했다면 그의 선견지명이 실행에 옮겨졌다면 지금의 한국은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대선 후폭풍이 지나간 지난 1996년 “나는 (대권 도전을) 실패라 생각하지 않는다. 시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2001년까지 약 5년 동안 ‘대북사업’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선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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