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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셋째주 화제의 책 '가시울타리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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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8-2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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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울타리의 증언/ 황용희 / 멘토프레스

(아주경제 이규진 기자) “아 그랬었구나. 로마를 정복한 민족들도 약탈에 저항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기는 했으나  펜과 종이는 빼았지 않았구나. 그래서 보에티우스 같은 이는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을 쓰게 되었구나…”

캄캄한 중세 암흑기에도 감옥에는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썼다. 전제군주 차르 체제하의 러시아에서도 시인과 소설가들의 펜과 종이만은 빼앗지 않았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의 차가운 옴스크 감옥에서 ‘죽음의 집 기록’을 썼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한용운은 ‘조선독립의 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가시울타리의 증언’은 감옥 안에서 ‘펜의 힘’ 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잘 보여준다. 시인 김남주는 “펜도 없고 종이도 없는 자유대한의 감옥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고대의 노예로, 중세 농노로, 일제치하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외쳤다.

감옥이라 해서 그들의 쓰고자 하는 욕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감옥 역시 삶의 한 부분이며, 작은 사회다. 김남주 시인은 펼친 우유갑에 나뭇가지나 못 조각, 손톱으로 꾹꾹 눌러 시를 썼다.

사실 일제시대에도 펜과 종이가 허용됐다. 때문에 ‘조선독립의 서’ ‘동양평화론’ 등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펜과 종이가 사라졌다. 1950년대는 수감자 70%가 좌익수였다. 옥중 저술활동이 사회에 더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에 금지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1961년 5·16쿠데타를 성공한 후, 군사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 인사들을 적으로 규정해 투옥시켰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은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이 외부로 알려지자 청와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후 전국 교도소의 필기구는 수거돼고, 집필 금지 특별지시가 떨어졌다.
우리나라 행형시설에서 재소자에게 정식으로 필기구를 허가된 것은 구소련 몰락과 동구권이 해체된 1990년대 초다. 냉전시대와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교도소 내에 펜의 자유가 허락된 것이다.

책은 15척 담장안에서 벌어지는 교도소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교도소내의 사회에 대해 관찰하고 기록됐다. 저자는 현직 교도관으로 30년 넘게 교도관 재소자를 돌보고 있다. 30년의 세월은 한국의 우여곡절을 담은 시간이다.

저자는 민주화 운동이나 정치관련 수감자를 포함해 일반 수형자들에 대해 치밀하게 기록했다. 12·12 군사반란 관련자, 이부영, 김근태, 6월 항쟁 등 굴곡 있는 현대사를 사실적으로 썼다. 또한 평범하고 잔잔한 일반 수형자들의 사연도 담고 있다. 이 책은 어두운 사회사, 즉 가시울타리 속의 민중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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