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12·1] 갤로퍼 신화, 그리고 기아차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0-08-26 02:17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갤로퍼로 인정받은 정몽구, 기아차 인수 때 대권 쥐어

1980년대 말, 정몽구 회장은 한계에 부딪혔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현대자동차써비스는 전국 곳곳에 촘촘한 네트워크를 갖추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현재 현대자동차서비스는 23개의 직영센터와 1500여 서비스협력사를 보유하고 있다. 당시 이 회사가 1982년부터 판매까지 담당했던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촘촘한 전국망을 갖췄다.

참고로 현대차는 지난 1998년 직영 판매망을 줄이는 대신 대리점 제도를 양성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역시 정몽구 회장 산하의 컨테이너 사업을 해 오며 외화벌이에 나선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도 10여 년이 지난 1987년께 중국.동남아 등 후발국의 낮은 인건비 공세로 주춤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의 40%를 점유하며 세계 1위에 오른 현대정공은 냉동컨테이너 등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에 나섰으나 후발국의 추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몽구 개인에 있어서도,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현대정공에 있어서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할 때였다. 고민하던 정몽구 회장은 1988년 유기철 사장(기아차 부회장을 지낸 후 정년퇴직)에게 속칭 ‘지프’로 불리던 4륜구동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을 지시한다.

   
 
 현대차 울산공장을 방문한 정몽구 회장.

◆정몽구, 첫 완성차 꿈꾸다=
10년 이상 서비스나 부품, 컨테이너 사업만 해 온 정몽구 회장에게 완성차 사업은 꿈이었다. 정몽구 회장은 1986년 완성차 사업의 바로 이전 단계인 ‘골프카’ 사업에 뛰어든다. 1987년 개별 협약을 맺고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한 상태였다.

하지만 좋은 여건은 아니었다. 선대 정주영 명예회장처럼 맨 땅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1988년 당시 ‘포니맨’ 정세영 회장이 건재했다. 또 정 회장은 아직 아버지로부터 본격적인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상태도 아니었다.

정 회장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지프차를 개발키로 한다. 당시 현대차에는 지프차, 즉 SUV 라인업이 없었다. 수요가 있었다 해도 해외 생산·판매에 주력하고 있을 때여서 4륜구동차에 힘을 쏟을 여력도 없었다.

또 국내 시장은 쌍용이 ‘코란도’를 앞세워 지프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정주영 명예회장 역시 이 같은 점을 고려해 아들이 이끄는 현대정공의 지프차 사업 진출을 격려한다.

현대정공의 완성차 사업 진출이 정 회장의 단독 아이이어였는지 정 명예회장의 귀띔이 있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단 정 명예회장은 당시 대권의 꿈을 꾸기 시작, 경영은 대부분 형제 및 아들, 측근 인사들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따라서 이 역시 정몽구의 독자 아이디어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갤로퍼.
◆누구도 예상 못한 갤로퍼 신화=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1988년 5월, 정 회장 주재로 사업추진 보고회가 열리고, 크라이슬러 ‘랭글러’, 이스즈 ‘트루퍼’ 등 견본 차량들이 들어왔다. 기아차 부사장까지 지낸 고(故) 임승근 씨 등이 현대차에서 4륜구동 개발을 위해 현대정공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X-100 프로젝트’로 명명된 4륜구동 개발은 회사 내에서도 ‘시장성이 없다’는 부정론이 많았다. 미국 시장조사평가기관 J.D.파워 의뢰 결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몽구는 이듬해(1989년) 결단을 내린다. 지프차 중 가장 잘 팔리는 모델을 조사하고 차량 설계도를 도입하기로 한 것. 개발비를 절감하는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의 ‘파제로’였다. 그것도 미쓰비시 측의 반대로 신형이 아닌 구형 엔진을 들여와야 했다.

미쓰비시는 1970년대부터 현대차와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미쓰비시가 현대차 차량 개발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당시 현대차 직원들이 미쓰비시 파견 직원들에 술을 사주며 자동차 개발 기술을 귀동냥하고, 이들이 버린 도면을 주워다가 면밀히 분석한 일화들은 지금도 무용담처럼 전해진다.

그런데 스승 격이었던 미쓰비시가 2000년 들어 쇠락하고 현대차가 글로벌 톱5로 올라서게 된 것은 재미있다. ‘청출어람’인 셈이다.

정몽구는 1991년 10월 출시가 되기까지 거의 1년 동안 울산 공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일주일에 두세번씩 내려갔다. 출시 반년 전부터 현대차써비스에는 지프판촉부가 설립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기자간담회에서 현대정공이 시장점유율 50% 목표를 밝혔지만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갤로퍼는 첫해 1만6000대를 판매했다. 4개월 만에 쌍용 코란도를 앞지르고 SUV 부문 1위로 올라섰다. 그 이듬해는 2만5000대가 판매됐다. 후속 모델인 ‘싼타모’도 개발에도 나섰다.

이 같은 차남의 성공에 정주영도 흐뭇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곧 정세영이 맡고 있던 자동차를 정몽구에 줘도 되겠다는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가 된다.

   
 
기아차 광주공장을 방문해 공장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는 정몽구 회장 모습. 정몽구 회장은 지난 1999년 기아차를 인수해 성공적으로 회생시킨 주역이다. 기아차의 올해 연간 글로벌 판매 대수는 200만대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기아차 인수, 자동차 대권 쥐다=
첫 완성차 성공이 정몽구 회장에게 기회가 됐다면 기아차 인수는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 내에서 자동차 대권을 쥐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기아아시아차 인수 제의를 받은 정주영은 이를 수락했고, 곧 아들 정몽구를 불러들여 “앞으로 기아 인수는 네가 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몽구 회장은 1996년 그룹 회장으로 올라서며 자동차 부문을 총괄하고 있었지만, 정주영의 동생 ‘포니맨’ 정세영도 명예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조카 정몽구가 기아차 인수 전면에 나서며 정세영은 자동차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1997년 외환위기로 법정관리 중이던 기아차는 현대차를 비롯, 포드, 대우, 삼성차 등이 입찰했다. 하지만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광주공장)를 묶어서 팔려는 정부의 계획 때문에 유찰 가능성이 높았다. 김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98년 말 정몽구는 기아차 인수를 확정짓는다. 그해 12월 회장에 취임한 후 “내년 80만대를 생산해 30만대는 내수 시장에 팔고 50만대는 수출하겠다”고 공언한다. 당시 기아차의 연 판매대수는 40만대 수준이었다.

정몽구 회장이 특히 관심에 둔 것은 ‘카니발’. 카니발의 상품성을 눈여겨 본 정 회장은 카니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 개선을 지시했다. 그 결과 1998년 3만여 대 판매에 그쳤던 이 차량은 이듬해 8만6000대, 그 이후 연 15만대의 판매고를 올리며 ‘효자 상품’으로 부상했다.

이뿐 아니다. 기아차는 정상화 첫 해인 1999년 단 2개월 만에 내수 3만대, 수출 6만대 등 9만대 이상을 판매하며 대우차를 제치고 판매 2위로 올라섰다. 그 해 판매 목표도 80만대에서 83만대로 늘려 잡았다.

한편 정상화 11년째를 맞은 기아차는 ‘디자인’이라는 아이콘을 덧입힌 채 승승장구하고 있다. 특히 올해 K5·K7 등 일명 K시리즈를 앞세워 내수 점유율 38%로 현대차(41%)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해외 공장을 통한 현재 판매도 급격히 증가, 올해 글로벌 200만대 판매 돌파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