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이정은 기자) 1995년 초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교사들이 유색인종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담당교사는 "거리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시위를 하고 있으니 지금 학교 밖으로 나가면 봉변을 당할 수 있다"고 주의를 줬다.
그날 저녁, TV에서는 동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이 돌에 맞거나 집단 구타를 당해서 앰뷸런스로 실려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맞을 수 있고, 가족도 없는 곳에서 비명횡사할 수 있겠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 21일 호주 총선이 실시됐다. 노동당과 야당연합간의 '초박빙' 상황이 1961년 이후 최고조로 재현됐다. 이번 선거의 주요 쟁점이 됐던 자원세도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지만, '인종차별'의 상황을 겪어봤던 기자는 어떤 공약보다도 '이민규제' 관련 공약에 가장 관심이 갔다.
그간 노동당은 인구가 늘어야 국력이 신장된다는 '빅오스트레일리아(Big Australia)' 정책을, 자유당은 "매년 이민자 수의 증가세를 파악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정책을 내세우며 각을 세워 왔다.
그러나 국제적인 이민법 강화 추세 때문인지 노동당 정부는 이민자에게 문호를 넓히려 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자 호주에서도 이민자들에게 밥그릇을 빼앗길 수는 없다는 경계감이 고조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여야가 주택, 환경, 인구증가, 고용 문제 등에 집중하느라 이민법에 대해서만은 한 목소리를 냈다.
토니 애버트 자유당 대표는 집권시 연간 이민자수를 17만명으로 제한하는 이민정책을, 노동당은 이민자 수를 현재 연간 30만명에서 2012년 14만5000명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아쉽기는 하지만 기자는 이민자들에게 좀 더 관대한 노동당을 응원했다. 적어도 "동양인들은 모두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폴린 핸슨 의원과 같은 극우주의자가 다시 등장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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