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초순 어느 날 새벽 1시경, 중국 따렌(大連) 국제공항 대합실. 기자는 홀로 상념에 잠겼다. ‘이렇게 낙후된 공항시설도 있단 말인가' '이토록 짙은 그늘을 가진 중국이 제대로 성장 할 수 있을까’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따렌공항에는 그 흔한 난로 하나 없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만주(滿洲)의 겨울바람이 윙윙 밀려들었다. 혹한(酷寒)은 등뼈를 파고 들었다.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빛바랜 벽시계는 똑딱 거리며 새벽 3시를 향하고 있었다.
추위를 쫒기 위해 둘러본 공항대합실의 면세점. 빛 바랜 중국산 담배와 특산품, 술들만이 초라하게 진열돼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품질이나 디자인이 '거져 줘도 갖지 않을 만큼' 조악했다).
깡마른 군인들 서넛이 꾸벅꾸벅 졸면서 외국인 승객들을 경비하고 있었다.
2박3일간의 상하이(上海) 취재를 마치고 베이징(北京)행 여객기에 올라선 것은 7시간 전인 전날 저녁 8시. 2시간쯤 지나 기내방송이 나왔다.
"승객 여러분 죄송합니다.짙은 안개 탓에 베이징 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1시간여 비행 끝에 이 곳 따렌 공항에 불시착한 것이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나타난 현지 공항 당국자와 중국인 스튜어디스. 서투른 영어로 “따렌시에는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고급호텔은 한 곳 밖에 없다”고 했다.(당시에는 '국제도시에 이런 곳도 있나' 하는 심정이었다. 지금의 따렌시를 보면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노약자와 어린이, 환자들 위주로 150여명 가량이 손을 들었다. 그들 만이 덜컹거리는 공항버스로 호텔을 향했다. 100여명 가까운 나머지 승객들. 모두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혹한의 겨울밤. 시골 역사를 연상케 하는 공산국가의 공항 대합실. 공포와 추위 속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샐 수 밖에 없었다. 불안감을 지나 분노까지 치밀었다. (길고 딱딱한 나무의자는 시골 역사 대합실의 의자만도 못했다.)
하얗게 밤을 새고 난 아침 10시경. 여객기는 베이징 공항을 향했다. 이륙하자마자 승객들의 얼굴에는 환희가 배어났다. 기자는 이내 단잠에 빠져들었다. 베이징 공항을 내려다 보면서 기자는 또 다시 상념에 사로잡혔다.
... ‘약동하는 상하이’와 ‘낙후된 따렌’으로 대비되는 ‘절음발이 중국경제’가 과연 불균형 문제를 어떻게 치유할까. 따렌이 오늘의 상하이를 따라잡는데 20년은 걸릴 걸... 서방의 일부 경제전문가들의 전망대로 중국경제가 ‘중화시대(中華時代)를 열어나갈 수 있을까...
이런 의문부호를 머리에 담고 취재를 이어간 기자는 7박8일간의 중국 일정을 마쳤다. 그리곤 내내 13년 동안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중국경제를 지켜보았다.
■ 13억 인민의 작품, 13년의 고속 압축성장
2005년 11월 16일 대한민국 청와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이 전반적인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 나가자’고 합의했다. 나아가 한국정부는 중국에 시장경제지위(MES. Market Economy Status)를 부여했다. 중국의 오랜 숙원을 풀어 준 셈이다. 시장경제지위란 시장의 가격 결정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선진형 경제국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중국과의 교역 규모가 1000억 달러가 넘는 국가 중 중국에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한 것은 한국이 처음.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은 아직 이를 중국에 부여하지 않고 있다. 시장경제지위를 인정받으면 관세상 혜택을 받게 돼 한국에 대한 수출에서 상당한 혜택을 받게 된다. 선진국들은 2001년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가입을 허용했지만, 정부의 시장가격 통제를 이유로 이를 허용치 않고 있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으로선 세계무역시장에서 시장경제지위를 인정받는 오랜 숙원을 한국에서 푼 셈이다. 후 주석은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정상회의에 참석 하기 전에 영국과 독일을 들러 또 다른 실리 경제외교를 펼쳤다. 앞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선 에너지외교를 구사했다.
중국은 현재 세계2위의 석유 소비국이고, 세계1위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은 이미 아프리카 수단의 석유 중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군대를 파견해 석유자원을 보호하고 있다.
중국의 4세대 지도부는 올들어 경제성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누비면서 세일즈외교를 펼치고 있다. 에너지가 풍부한 국가에는 에너지 오더를 주고 원자력 발전과 고속철 기술을 가진 국가에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주한다. 수출시장이 필요한 국가에는 수입 오더를 던지고 있다.
고령화와 정치적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연합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시장도 역동하는 중국경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13억명이 넘는 중국의 소비자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소득의 30% 선을 저축하고 나머지는 소비할 것이다.
중국 내부에서 자라난 수백만명의 기업가들은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 이라는 덩샤오핑시대의 슬로건 처럼 부자가 되기위한 방법을 찾아 나설 것이다. 4세대 지도부가 갖고 있는 중화시대 부활의 꿈은 5세대 지도부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적어도 2020년까지는 중국경제의 눈부신 팽창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후 주석이 방한하기 전 열린 APEC 통상장관회담에는 5세대 지도부 선두그룹 중 한명인 보시라이 상무부장이 참석했다. 그는 라오닝(遼寧) 성장을 지내다 2004년 3월 상무부장에 올랐다. 보 부장은 93년부터 2001년까지 따렌 시장과 서기를 지냈다. 그는 지난 92년말 벽촌(僻村)과 같던 따렌시를 불과 8년 만에 동북3성(省)을 대표하는 국제 상공업도시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이다.
허더런 따렌시장은 지난해 기자에게 “지난 92년 취재 당시 따렌공항과 지금의 따렌공항을 비교하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물었다. 기자는 "따렌시의 경제 발전이 광속처럼 빠른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답했다.
허 시장은 "중국인인 자신이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속도"라고 말했다. 허 시장의 선임인 보 부장은 따렌시를 고속성장시킨 공로로 자신도 고속출세했다.
사실 지난 92년 12월 초순 기자가 상하이 푸둥(浦東)지구를 취재 할 때에는 고층건물 2~3동만이 올라가고 있었다. 공사현장에서 3~4km만 걸어가도 낡고 빛바랜 건물들이 즐비했다. 지금의 푸동지구는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모습이다.
당시 방문했던 상하이 시민들의 눈에는 광기스러운 경제성장의 열망이 담겨져 있었다. 뒷골목에서 개인 직영 상점인 꺼티후(個體戶)를 운영하는 30대 중반의 장바이탄(姜伯啖)씨가 기자에게 자신있게 내던졌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형제국가다. 하지만 한국은 관심수준의 국가일 뿐이고, 중국이 조만간 미국, 일본과 견주는 대룡(大龍)으로 떠오를 것이다.”
오늘의 중국은 중국지도자들의 뛰어난 리더십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13억 인민들의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년 전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제성장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 '앞을 보고 뛰자'에서 '돈을 보고 뛰자'로
“사회주의국가 시절 마오쩌뚱 주석이 외친 저우치엔칸(走前看: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앞만 보고 뛰어라)은 이제는 저우치엔칸(走錢看: 돈을 보고 뛰어라)으로 바뀌었다. 경제건설에는 고정관념이 없다.”
사회주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 자본주의 장점도 얼마든지 가미할 수 있다는 논리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1979년 이래 서방의 경제학자들은 주기적으로 중국의 붕괴론과 분열론, 일시적 부흥론을 제기해 왔다.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난 동서간 소득격차. 도시의 빈민촌들. 가난해져만 가는 농민과 노동자. 실업자 문제와 부실은행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 같은 국영기업개혁. 판도라의 상자 같은 국영은행. 소수민족 문제...
이 모든 것들이 중국경제의 아킬레스건들이다. 여기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지탱해 온 공산주의와 경제성장 논리가 서로 모순 덩어리처럼 충돌하고 있는데, 중국경제가 과연 연착륙(軟着陸)할 수 있을까.
기자로서도 ‘알다가도 모를 중국’이긴 하지만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경제가 연착륙에 실패하면 세계시장의 위기가 오고, 그 중에서도 한국경제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전세계를 강타한 중국발 원자재 대란은 한국기업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한국경제와 한국인들이 이제는 중국경제와 중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궤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중국을 근본(根本)부터, 유리알처럼 살펴보지 않으면 한국경제의 미래는 결코 보장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중국위기론은 지난 26년간, 또는 기자가 첫 취재에 나선 후 13년 동안 간단없이 세계시장에서 제기돼왔다. 하지만 중국경제는 이를 비웃듯 고속질주해왔다. 13년 넘게 중국을 관심있게 지켜본 기자로서도 중국을 아느냐고 물으면, 역시 “모른다”고 답할 뿐이다.
다만 중국의 지도급 인사나 기업인, 일반 서민은 물론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인들과 공통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인들이 700년만에 찾아온 중화시대 부활을 위해 한 마음, 한 방향으로 용트림을 한다는 것이다.
■ "중국 경제발전은 세계의 이익"
일본 자본이 투자된 상해국제무역센터의 세다 미쓰오 대표는 지난 92년 “일본이 지난 60년대말 이후 중국을 그렇게 연구하고도 투자진출에 신중한 것은 중국의 투자환경이 아직은 미비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엔 중국의 저력을 십분 감안한 점도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에 진출했던 한국 기업인들의 진단을 되새기면 더더욱 실감이 난다. “중국은 거대한 국가임에도 경기조절 능력이 충분한 것 같다. 상하이를 비롯한 연해도시의 급속 성장으로 인플레의 후유증(부동산 값 폭등, 물가상승 등)이 심화하자 곧바로 감속성장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 93년 9월 이후엔 철강재 수출이 부진할 전망이다.”(김동진 포항제철 베이징사무소장: 현재 포철중국법인사장)
“중국은 외국자본 유입의 폐해를 잘 알고 있다. 자동차공업 역시 3大3小(대형차공장 3개소, 소형차 공장 3개소 허용) 전략에 따라 계획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다만 93년 9월 GATT(관세무역일반협정) 가입시 야기될 외국 승용차의 수입 러시를 막기 위해 승용차 부문의 외국자본 도입을 검토하고 있을 정도다. 외국의 비즈니스맨의 입장에서 보면 불만이지만 국가이익과는 부합되는 자동차공업 육성정책임에는 틀림없다.”(송훈천 현대자동차 베이징 사무소장: 현재 한국식당 ‘비원’ 사장)
“중국의 위세가 경제 측면에서 아직 놀라울 정도는 아니다. 다만 만만하게 보아선 안된다. 특히 경공업 우회수출기지 쯤으로 생각하는 경제협력 전략은 곤란하다. 상당수 중국인들은 자원이 없는 일본과 한국의 국민들이 불쌍하다고 여기고 있을 정도다. 자신들은 풍부한 자원을 토대로 이제부터 경제대국 건설에 나섰다고 생각한다.”(박찬혁 대한무역진흥공사 베이징사무소장: 현재 한국전각협회 부회장)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의 서사현 상무관을 통해 한국기업의 중국진출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은 중국의 3번째 교역상대국이자 7번째 투자국이다. 한국은 장기적으로 중국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중국과 상호보완적 협력관계를 모색해야 한다.”(웨이샤오롱 중국대외경제무역부 아주사(국) 부사장)
“사무실 임대료가 뛰는 것은 어느 나라든 개발도상 과정에서 반드시 겪는 일이다. 상하이 지역에서는 많은 사무용 빌딩이 지어지고 있다. 내년 이후 중앙정부는 감속성장을 펼칠 것이다. 올해의 경제성장률을 10~20%로 추정한다면, 내년에는 중앙정부가 6~7%대로 성장률을 조절할 것이다. 이 경우 과열경기도 잠잠해지고 값 싼 사무실이 늘어날 것이다.”(후징장 중국국제상회 상하이상회 부회장)
“한국에서 정부와 재벌 기업이 수시로 마찰을 일으키는 것과는 달리 중국의 역사에서는 ‘정(政)-군(軍)-상(商)’ 3자간의 갈등이 적었다는 점도 직시해야 한다. 중국인들은 4800km 길이의 양쯔강을 대룡이라고 여긴다. 이 강의 포구에 위치한 상하이는 바로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용의 머리가 자본주의에 눈뜨기 시작한 만큼 상하이에서 불어오는 경제약진의 열기가 강줄기를 따라 용의 꼬리까지 미치게 되면 중국경제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용트림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쯤이면 황해 경제권은 물론이고 태평양경제권까지 대룡의 영향력이 미칠 것이다.”(궈싱훠 상하이대학 상학원 부원장)
정확하게 13년 전의 진단이지만 무서우리만치 ‘현재와 맥락이 연결된 진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는 지난해 경기 감속정책을 단행했고,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균형성장정책을 발표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무역박람회에 대한 비전도 밝혔다. 보시라이 중국 상무부장은 올해 3월 22일 베이징에서 열린 `2005 중국발전포럼`에서 '중국 경제의 발전이 세계 전체에 이익'이라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중국산 제품의 수출 증가로 미국이나 유럽 소비자들의 구매 여력이 늘어 생활비도 감소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마디로 중국시장이 세계경제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다는 무서운 자신감이다. 그는 "중국의 경제 발전은 세계 경제에 동참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외국 자본과 수익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중국인 모두 중화시대의 부활을 꿈꾸고, 한 목소리로 '21세기 중화 르네상스'를 외치고 있다.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국인 특유의 역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거대한 중국의 용트림. 4800만 한국인들은 중화시대의 부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곽영길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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