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규의 중국 이야기4-2> 드라마 ‘촹관동(闖關東•산하이관을 넘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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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1-0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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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장 철도의 나라, 궤도위에서 만난 중국.

 
 
 창밖의 어둠이 꾀나 짙어졌다. 기계 처럼 빠른 손동작으로 해바라기 씨앗을 입에 넣는 여성, 껍질 채 삶은 땅콩을 까먹는 처녀. 캔맥주를 홀짝이는 30대 남성. 어둠이 내리는 저녁 무렵 기차 안의 풍경은 평화롭고 한가하기가 그지없다. 침대칸 승객들끼리 통성명하고 잡담을 나누기에도 맞춤한 시간이다. 롼워(軟卧) 침대칸의 승객은 여대생과 아주머니,직장인 남성 한명, 나 이렇게 네명이었는데 직장인 한명만 빼놓고는 세명 모두 종착역인 광저우까지 여행하는 사람들이었다.

  “동물원에서 두번째 큰 동물이 뭐지요?”
 대학생 짠카이(戰凱)가 같은 침대칸의 다른 세명 승객에게 물었다.

  “.. ...”
 
 “하하. 몰라요? 샤오샹(小象 새끼 코끼리)” 그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맞추는 사람이 없어 혼자 묻고 대답하길 서너차례. 그녀의 수javascript:fncSaveInfo()수깨끼는 여기서 끝났다.
 
"내일 아침 광저우에 도착하면 낮에 일 보고 저녁에 제 남자 친구랑 셋이 만나 바이윈(白云)산에 올라가 보름맞이를 해요. 정말 볼만합니다. 바이윈산 보름맞이는 특히 연등(등롱)이 유명하죠. 달빛이 내리는 가운데 산 전체가 온통 연등으로 뒤덮혀 황홀경을 연출한답니다.”
 짠카이는 보름맞이 저녁 행사에 나를 초대했다. 그녀는 웨이하이가 고향인 산둥(山東)성 사람으로 아주 활달하고, 사교성과 붙임성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인데도 거리감을 두고 경계심을 보이기 보다는 편안하고 따뜻한 호의를 보여줬다. ‘무간도, 장강 7호, 화양연화 이런 영화가 재밌어요.’ 영화와 드라마 얘기가 나오자 자신이 재밌게 봤다며 중국 영화 몇 편을 추천해 줬다.
 
 장거리 기차 여행에서는 별별 부류의 사람을 다 만나기 마련이다. 지저분한 사람과 깔끔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사교적인 사람과 내성적인 사람, 뭔가를 열심히 탐색하려는 사람과 남의 일에 무관심한 사람, 자기말만 하는 사람과 열심히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 조신하고 얌전을 빼는 사람과 허풍을 떠는 사람, 젊은이와 노인네, 남방사람과 북방사람, 한족과 소수민족, 농민공과 화이트 칼라 직장인. 잡지를 뒤적이는 남자와 기차내에서 대여해주는 전자 게임기를 갖고 노는 꼬마아이.
 
 기차안에서 짠카이와의 만남이 내게 특별히 흥미로웠던 이유는 그녀가 바로 당시 내가 즐겨 봤던 중국 TV드라마 ‘촹관동(闖關東)’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제목 촹관동은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동쪽으로 갔다’는 뜻이다. 드라마 촹관동은 청나라말기인 1890년대말 의화단사건이 발생한 직후 산둥과 허난 허뻬이성 일대 주민들이 전란과 기근을 피해 동북 지방으로 이주해 새 삶을 일구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의화단 사건의 행동대원중 한 명으로 산동성 출신인 주카이산(朱開山)이라는 주인공의 가정사가 큰 줄거리다. 동학혁명과 최씨 집안의 일대기, 시대사적 배경에 있어 박경리의 토지와 흡사하다.
 
 짠카이의 조상들도 청나라말 고향 산둥성 웨이하이를 등지고 촹관동에 나서서 아주 외진 동북지방인 헤이룽쟝성 치치하얼에 정착했다. 지난 2005년 짠카이 집안은 근 100년만에 다시 고향인 웨이하이로 돌아왔다. 역 촹관동, 말하자면 ‘촹관시(闖關西)’인셈이다. 그녀는 지금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남방도시 광저우의 미술 대학에 유학을 와서 인물 이미지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 그날 우리는 촹관동을 화제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드라마 촹관동에는 산동성 일대 주민들의 동북이주, 공산당 태동과 항일 투쟁, 근세기 난세를 견뎌내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베어있다. 군벌과 비적과 부패한 청 정부 관리들은 인민을 착취하는 이리떼와 다름없다. 주인공 주카이산의 세 아들은 각기 우유부단한 기회주의자, 열정가, 상업적 재능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애틋한 연분과 이별의 아픔, 이웃간의 사랑과 시기와 배신과 모략, 상권과 탄광 소유권을 둘러싼 알력, M&A와 함께 민족자본이 형성되는 과정 등 내용도 다채롭다.
 
 “드라마의 주인공 주카이산의 캐릭터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먼저 내가 얘기를 꺼냈다.
 
 “주카이산은 호랑이 같이 용맹하고 영웅적인 인물이지요. 중국의 혼입니다. 전통사회 며느리와 개화기 여성의 특성, 한없이 순종적이고 자애롭지만 강한 어머니, 극중의 이런 주인공들도 꾀나 매력있지 않았나요?” 그녀가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촹관동에 나오는 동북 철도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촹관동에 보면 동북 철도가 나오지요. 하지만 일제가 건설한 이 철도는 착취와 강탈, 침략의 도구였어요. 이에비해 순수 중국자본과 기술로 건설된 지금의 철도는 그 자체가 구원이고 복음이며, 경제 성장에 속도를 더해주는 엑세러레이터와 같은 겁니다.”
 
 나는 화제를 조금 돌려봤다.
 “촹관동은 주선율 영화의 특성인 체제 선전의 성격이 짙어요. 다만 격동기 중국이 처한 실상과 인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다뤘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한것 같아요.”
 
 체제 선전의 성격이 강하다는 나의 지적에 대해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당시 산동성 일대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가득했고 흉년과 기근 때문에 산동 지역에서만 촹관동에 나선 인구가 700만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
 촹관동에 대한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남자 친구 량화펑(梁華鋒)은 광동사람인데 역시 대학에서 나랑 비슷한 공부를 해요. 그는 실내 디자인을 전공하죠. 기회가 되면 함께 디자인 공부하러 한국에 갈까해요.” 그녀의 이 말을 꿈결속에 들으며 나는 나른한 피로감과 함께 단잠에 빠져들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표딱지를 바꿔가는 검표원, 시끄러운 안내방송, 짐을 챙기는 사람, 세면장에 가는 사람, 컵라면을 먹는 사람, 기차 여행의 아침은 부산스러움과 함께 시작한다. 베이징서 출발해 장장 34시간 가까이 달린 열차가 안도의 한숨을 내뿜듯 높은 경적을 울리며 마침내 종점인 광저우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우리는 저녁에 짠카이의 남자 친구랑 만나 광저우의 바이윈산에 올라 대보름 달맞이 구경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c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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