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에서 티베트 칭짱가오위안(靑藏高原)까지, 대형 상점부터 벽지의 구멍가게까지 중국 전역 어디를 가도 살 수 있는 상품이 있다. 바로 와하하(娃哈哈) 음료수다.
중국의 국민음료 ‘와하하’ 그룹 창업자 쭝칭허우(宗慶後) 회장은 현재 자산 55억 위안(약 9428억 원), 중국 19개 성시(省市)에 50여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억만장자다.
‘음료 대왕’으로 불리는 쭝칭허우는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사업가다. 항저우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제염소에 들어갔고, 1년 후 차(茶)농장으로 자리를 옮겨 집안 살림을 도왔다. 꽃다운 청춘을 농촌에서 단순 노동일을 하며 흘려보냈다.
쭝칭허우는 지난 1987년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대출로 14만위안의 자본금을 마련, 퇴직교사 2명과 함께 사이다, 아이스크림 및 문구용품을 파는 조그만 가게를 개업했다. 초라한 행색으로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비며 아이스크림을 팔던 중년의 쭝칭허우가 훗날 중국 식음료 업계를 주름잡는 대재벌로 변신할 줄은 그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돈을 불린 쭝칭허우는 지난 1989년 항저우에 ‘와하하 드링크제’ 생산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어린이용 식욕 촉진제를 출시해 이른바 ‘대박’을 치게 된다. 식욕촉진제의 대 성공에 힘입어 와하하는 창업 3년 만인 1990년 생산총액 1억 위안을 돌파했다.
지난 1991년 와하하는 항저우시 정부의 지원 하에 적자에 허덕이던 캔공장을 인수해 사업 확장을 시도했다. 6만 여㎡의 공장부지에 22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던 캔공장을 인수하면서 와하하는 실력과 규모를 갖춘 대기업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와하하는 1998년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코카콜라와 펩시가 장악하던 콜라 시장에 진출하기로 한 것. 쭝칭허우는 이들 양대 ‘콜라 대부’와의 정면전을 피하고 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중서부 지역 시장을 공략했다.
이른바 중국판 '콜라 독립' 선언이었다. 이 전략이 맞아떨어지면서 와하하의 콜라 ‘페이창커러(非常可樂)’는 중국 전역의 상점을 파고 들었고, 삽시간에 탄산음료 시장의 12%를 장악하게 됐다.
승승장구하던 와하하는 2003년 프랑스 식음료 기업 다논(Danone)과 소송에 휘말리면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와하하는 다논과 1996년 합자계약을 통해 다논의 상품을 ‘와하하’ 브랜드로 중국 시장에 유통시키기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2003년 양사는 상표권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 분쟁은 국제 법정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다논은 합자회사 지분 51%를 와하하에 매각하기로 합의 하고 양사는 14년 간의 협력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현재 와하하는 중국의 ‘민족 기업’으로 소비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생수시장 점유율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쭝칭허우는 '몸값' 80억 달러로 2010년 포브스 중국 부호 리스트 1위를 차지했다.
저학력의 농촌 출신으로 연간 매출액 70억 위안의 대기업을 일군 자수성가형 사업가 쭝칭허우는 많은 중국 예비기업가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