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 오후 막 해가 떨어진 서부전선 최전방 애기봉 전망대.
북한의 포격 위협 속에서 산타 모자를 쓴 대학생 성가대의 캐럴 합창이 울려 퍼졌다. `창밖을 보라'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 귀에 익은 친숙한 화음이 흘러나왔지만, 행사 직전 대피요령까지 들어야 했던 참석자들의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애기봉 일대엔 이미 최고 경계태세인 `진돗해 하나'가 발령돼 있었다.
드디어 오후 5시35분.
예정 시각보다 10분 정도 이르게 김문수 경기도지사, 한나라당 나경원·차명진 의원,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당회장, 김삼환 담임목사, 박환인 장로 등이 점등 스위치가 놓은 테이블 앞에 나란히 섰다.
사회자가 `하나, 둘, 셋'을 외침과 동시에 이들은 지름 10㎝ 정도의 빨간색, 녹색 버튼을 힘껏 눌렀다.
순간 웅장하게 솟은 30m 높이의 등탑에 줄줄이 매단 10만개의 LED 전구가 일제히 빛을 발했다. 멀리서 보면 전체적으로 파란 빛을 띠는 성탄트리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흰색의 다섯 가지 색으로 빛나며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밝혔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신도들 사이에서 한마디씩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400여 명의 참석자들은 그제야 손뼉을 치며 다시 환호를 보냈다.
북한이 불을 밝히면 `공격 목표'로 삼겠다던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애기봉의 성탄트리는 7년 만에 극적으로 불을 밝혔다.
2003년 겨울 이후 덩그러니 철제 구조물로 남아있던 등탑을 따뜻한 불빛이 휘감았다. 해병대 팔각모를 본뜬 등탑 밑변 아래로 LED 전구 전선줄이 부드럽게 늘어졌다.
한강 너머 북한 땅을 고스란히 굽어볼 수 있는 애기봉은 북한 개풍군과 거리가 3㎞에 불과해 트리에 불을 밝히면 개성에서도 또렷하게 불빛을 볼 수 있다.
성탄트리를 자본주의의 선전도구로 보는 북한 입장에서 애기봉 등탑은 그야말로 눈엣가시인 셈이다.
이날 점등식을 앞두고 이 지역 방어를 맡은 해병 2사단은 어느 때보다도 삼엄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취재진도 신분증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반드시 군의 통제에 따르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뒤에야 애기봉에 오를 수 있었다.
돌계단을 250m 정도 걸어 올라가 애기봉 정상 전망대에 도착하자 한강 하류와 강 너머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대에 설치된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강변을 따라 철책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곳곳에 경계초소가 설치돼 있었다. 초소 주변을 거니는 북한군 병사의 모습도 손에 잡힐 듯했다.
전망대 옆에는 1971년 세운 국기 게양대가 서 있었다. 성탄 트리는 이 게양대에 설치됐다. 전체 높이 30m의 국기게양대 상단에는 하얀 십자가가 놓였다.
성탄트리 설치공사를 맡은 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주 수요일 시작한 공사는 이날 오전에야 끝났다. 전날 연평도 포격훈련으로 이 일대에 대피명령이 내려져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점등식을 주최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신도 400여 명은 점등식에 앞서 전망대 강당에서 예배를 올렸다.
강당 좌석에는 비상사태 발생 때 대피요령을 적은 안내문이 놓여 있었고 예배시작 전 군 관계자가 대피장소와 대피요령을 설명했다.
해병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민간인을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키기 위한 안내요원 80여 명을 전망대 주변에 따로 배치했다.
북한의 공격 위협과 우리 군의 삼엄한 경계태세에도 여의도순복음교회 신도들은 크게 염려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신도 배창복(63·여)씨는 "약간 걱정됐지만 북한이 이곳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무모한 짓을 했다간 국제사회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왕따가 될 것을 북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병2사단장을 지낸 박환인(예비역 소장) 순복음교회 장로는 "지금까지 북한에 속아서 이 트리에 불을 밝히지 못했지만 오늘 북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점등식을 열었다"고 감격했다.
점등식은 15분 만에 끝났고, 북한은 경고와 달리 이곳에 포탄을 날리지 않았다. 애기봉 성탄 트리는 26일 오전 0시까지 빛을 발할 예정이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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