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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프론티어]대변인직 수행 1000일…“정신력으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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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1-1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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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먼프론티어]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

(아주경제 차현정 기자) “벌써 1000일이나 됐다. 아침에 눈도 뜨기 전부터 전화를 받고 밤에 잠들면서까지 전화를 받은 지가. 하루 150통에서 200통 정도를 받다보면 때론 귀가 윙윙 거리고 전화가 오지 않는 시간엔 전화가 꺼있는지 확인을 했다. 차에서도, 기차간에서도 깔개를 하나 갖고 다니며 논평을 작성했다. 하루 종일 대표 수행을 했다. 거기에 내 의정활동까지 하다 보면 정신이 없더라."
 
 18대 국회가 출범하기 전인 2008년 4월16일부터 자유선진당 대변인을 맡아 온 박선영 의원. 그가 10일 대변인직 수행 1000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아휴, 믿어지지 않네요. ‘2년 지났네’, ‘3년 다 됐구나’ 했는데. 요즘은 ‘억’도 모자라 ‘조’ 단위에 길들여진 모양이지만 과거 1000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박 대변인은 100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했다. 동양에서 만(萬)이라는 숫자가 거의 변하지 않는 영원을 상징한다면 서양의 1000이라는 숫자는 무엇의 끝이거나 다시 시작하는 단절과 분절을 의미한다.
 
 지난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박 대변인은 그간의 1000일을 ‘가시밭길‘과도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변인직은 3D(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운) 업종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는 자조 섞인 그의 목소리에 충분히 배었다.
 
 “보통 1년 이상 안하죠. 그만큼 어렵다는 거예요. 매일매일 피 마르도록 정신을 집중해야 했어요. 게다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쇠고기 정국이 시작되는 바람에…”
 
 2008년 4월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사실상 전면 수입 개방으로 쇠고기 사태가 정국을 강타했던 때다. 당시 미국산 쇠고기 개방에 따른 광우병 공포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국가적 파문이 일었던 것.

박 대변인은 “다른 당이 모두 미국 소는 미친 소라며 감정적 접근을 하고 논평을 할 때 자유선진당은 법적 문제만을 꼬집는 논평으로 다른 당과 차별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가적 재앙이 오히려 3당의 작은 당 대변인에는 입지를 굳힐 기회를 줬다는 게 박 대변인의 설명이다.
 
 “여러 차례 사양한 끝에 국회에 등원했어요. 저처럼 등 떠밀려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이요. 그러나 저에게 정치가로서의 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수 시절부터 사회 정의 문제와 인권문제, 한·일 간 과거사 문제,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많은 관심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회 등원과 동시에 학자로서의 고민을 넘어 문제 해결을 위해 발로 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죠.”
 
 박 대변인은 방송기자를 지낸 헌법학 교수 출신이다. 그런 자신을 평생 소수자로만 살아왔다고 표현하는 그다.
 
 “30년 전 여기자는 별종이었어요. 또 헌법학 교수 가운데 여자는 지금도 얼마 안 됩니다. 가족법이나 국제법과 같은 과목을 제외한 형법, 민법 등 기본법학에 여자 교수를 임용하는 일은 드물어요. 정치권에서도 3당 비례에 초선의원은 열악한 소수죠.”
 
 최근 사회 전반에 걸친 여성 약진에 대해 견해를 들어봤다.
 
 “여성들은 굉장히 뛰어난 DNA를 가졌어요. 남성보다 넉넉한 마음이 그렇죠. 제가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껴요. 근 10년 사이 정부 기관 요직에 여성이 임명되고 최초 여성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에, 국무총리까지 나오지 않았겠어요. 대단한 발전이라고 봅니다.”
 
 다만 여전히 멀었다고 설명하는 박 대변인이다. 특히 그는 ‘여성’ 접두어가 쓰이고 있는 데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말이 붙는 건 평생을 살면서 싫었어요. 그 자체가 주는 '차별성'에서 그렇죠. 특히 여성의 정치진출을 넓히기 위해 도입한 여성 쿼터제. 물론 처음엔 필요했지만 돌아오는 부정적 측면이 있더군요. 바로 똑똑한 여자는 귀찮고 골치 아프다는 시각입니다. 악용되고 유용하는 경우는 오히려 독이 된다고 생각해요. 자질과 능력이 없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목적, 단지 선택 자 편한 대로 여성정치인수 채우기로만 부각되는 것 같아요.”
 
 정치인으로서의 최근 몇 년 꽤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았다.
 
 “국민들에게 매도당하는 게 가장 힘들죠. 국민들이 가진 선입견, 정치인(정치인은) 썩어빠지고 쓰레기처럼 내다버릴 존재로 각인돼 있어요. 부패하고 싸움만 할 줄 알고 엉뚱한 데만 신경 쓰고 속과 겉이 다른 사람으로요. 아시겠지만 정치인들도 열심히 하는 분들은 참 열심히 하시는데 말이죠. 또 다른 어려움은 '경쟁과 결투'라는 남성적 방식이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거예요. 일례로 이번 예산안 강행처리와 국회 폭력사태를 꼽을 수 있겠죠. 여야가 4대강 사업과 친서민 예산 등을 놓고 대립하는 건 국회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일의 해결책이 꼭 결투와 경쟁뿐일까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꼭 상대를 쓰러뜨리고 올라서야만 할까요.”
 
 특히 정치인과 아내, 어머니 등 1인 3역을 소화해내는 박 대변인이지만 아내와 어머니 역할에서는 '빵점'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큰 아이를 낳고 2주 만에 직장에 복귀했어요. 30년 전만해도 결혼하면 퇴직해야 하는 게 방송국 관례였죠. 아이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소풍, 체육대회 등에 따라가지 못한 것도 내내 미안함으로 남아있어요. 남편에게도 역시.”
 
 그의 남편인 민일영 대법관. 그의 박 대변인을 향한 '10년간 해바라기 사랑'은 유명하다. 그런데 과거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맞벌이 여자와 살면서 남편이 알아서 변하더군요. 처음엔 '정치인 아내'에 반대했던 남편이지만 현재는 고무장갑 안 끼고 설거지 돕느라 주부습진까지 생긴 제 남편이예요. 그렇지만 제 작은 아들과 함께 가장 '센' 비판자이기도 하죠.” 그의 둘째 아들은 가끔 홈페이지에 “그런 논평을 왜 하시느냐”면서 그에게 눈치를 주기도 한단다.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은지 그의 다짐을 물었다.
 
 “야당 대변인으로서 정부권력을 감시·견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3당으로서 거대 양당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일 또한 제 역할 중 하나죠. 정부와 여당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 말고도 각 정당이 인기영합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책대결의 장을 펼칠 수 있도록, 또 그 과정에서 상대 당에 대한 맹목적 비판이나 폭언이 자제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숙의(熟議)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소수의견이 최대한 존중돼야 하는데 이는 제3당 대변인으로서 저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고 또 제가 더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국회를 떠날 즈음엔 국민들로부터 올곧은 소리를 할 줄 알았던 정치인, 잊혀지고 소외된 분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기 위해 몸을 살랐던 정치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박 대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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