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엄 사장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지만, 엄 사장 본인은 다른 꿍꿍이가 있다. 그런데 별장에 도착하기 전 잠시 들린 음식점에서 배달을 시킨 닭백숙을 가지고 배달부가 도착하면서 얘기는 점입가경으로 꼬인다.
스릴러의 백미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긴박감에 있다. 코믹은 말 그대로 상황과 캐릭터가 주는 우스꽝스러운 얘기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가 절묘한 배합으로 섞인다면 어떤 얘기가 나올까. 바로 해답이 ‘죽이러 갑니다’에 담겼다.

일단 이번 영화의 핵심은 독특한 설정과 ‘톤’에 있다. 별장이란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핏빛 잔혹극은 할리우드 B급 무비의 전형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단순히 모방에만 그치진 않는다. 국내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연기파들이 총동원 돼 이 상황을 벌이니 흡사 무대 위 한바탕 놀음을 보는 것처럼 유쾌하다. 핏빛 선혈이 난자하지만 전혀 잔혹스럽단 생각은 안든다. 오히려 잔혹한 상황 자체를 배우들의 대사로 ‘톤다운’ 시키며 웃음을 유발한다.
이 영화의 모티브는 연출을 맡은 박수영 감독이 본 한 UCC 동영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해고 노동자가 프로판 가스통에 불을 붙인 채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너무 우스웠다고 고백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문제의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꼬집은 것이다.
권력을 쥔 엄 사장의 가족들을 모두 불구로 만들며 이 같은 현실의 부조리를 영화는 대변한다. 횡포를 일삼는 가진 자들의 힘을 다리가 없거나, 한쪽 팔이 없고, 또는 한 쪽 귀만 열고 사는 인생 불구자의 아집처럼 표현했다. 이들의 독선과 아집은 가족이란 이름조차 무색케 할 정도로 파괴적인 모습까지 보여준다. 저마다 살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엄 사장의 가족은 흡사 영혼 빠진 좀비와 다를 바 없는 행색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욕지거리를 쏟아내고 처남이 매형의 돈을 위해 삶의 경계선에서조차 가식을 떠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엄 사장의 가족은 보통이란 범주를 벗어나 있다. 하지만 자신들의 별장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덮어버리기 위해 합심 단결하는 모습에선 무서울 정도로 한 몸이 된다. 집단 이기주의의 치욕스러움이 가득한 모습이다.
영화적 구성 역시 독특하다. 축구 경기의 전후반을 보는 것처럼 전반부가 해고 노동자 김씨의 울분 쌓인 테러에 초점이 맞춰 졌다면, 후반부는 닭백숙 배달부(박영서)의 살기 위한 도망이 시종일관 관객의 숨통을 조인다.

닭백숙 배달부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가족들이 벌이는 혈투는 시종일관 긴박한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얼핏 보면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가득한 장면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지만, 집중해서 보면 쉴새없이 웃음 짓게 만드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80분이란 러닝 타임이 아쉬울 정도로 영화의 몰아치는 전개가 관객들의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연극적인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 톤 등이 일반 상업영화와는 확실히 선을 긋고 있어 관객에 따라선 이질감이 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억여 원의 제작비와 16회차 만에 끝낸 독립영화란 점을 감안하면 수백억대의 블록버스터 못지않은 분명한 힘이 있다.
영화 ‘돌이킬 수 없는’으로 진지한 문제의식을 균형감 있게 다뤄 평단의 주목을 받은 박수영 감독의 ‘진짜’ 장편 데뷔작이다.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 ‘미드나잇섹션’ 부문에 초청돼 뜨거운 반영을 얻었고, 오는 24일에 개막하는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유바리 초이스:한국영화’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배우 이경영의 주연작으로도 관심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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