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 패러다임이 바뀐다

‘패러다임’은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라는 어마어마한 뜻을 담은 20세기 신조어다. 미국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머스 쿤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1962년)에서 새롭게 제시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본래 패러다임은 자연과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이제는 거의 모든 사회현상을 정의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워싱턴 미·중 정상회담을 마치고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다음 방문지인 시카고로 향하기 직전 중국 국가통계국은 중국의 2010년 국내총생산(GDP)이 전년보다 10.3% 많은 39조 7983억위안(약 6조 달러)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GDP는 아직 최종발표되지 않았지만 일본 내각부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예측을 토대로 추산한 결과 5조 4023억 달러로 중국과는 6000억 달러 가량 차이가 난다. 중국이 드디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것이다.

지난 1978년 이래 최고지도자 겸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영도 아래 개혁·개방에 매진해 온 중국이 3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미국을 추격하는 G2로 올라섰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국제정치의 패러다임 변화를 예고한다.

2차대전 이후 근 반세기에 걸쳐 미국과 더불어 국제정치 무대를 양분해 오던 소련이 1991년 해체되자 세계는 미국의 단독 헤게모니를 뜻하는 1극(極)체제에 편입되었고 이 체제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초·응용과학의 탄탄한 기반에 기초하여 민수·군수기술을 무섭게 발전시키는 동시에, 에너지개발에서 금융에 이르는 수많은 산업분야에서 하루가 다르게 덩치를 키우고 내실을 다져가고 있다. 세계 10대기업에 중국기업이 여럿 들어 있으며, 세계 10대 은행도 그 절반은 중국은행이다. 세계최대 은행은 아예 중국공상은행이다.

중국은 2차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공황을 맞아 비틀거리고 있는 미국의 재정을 자국의 풍부한 외환보유액으로 떠받쳐 주고 있으며, 최근에는 국가부도 직전 상황으로까지 몰린 유럽국가들에 긴급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가 지난 5~9일 미국 성인 15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국인이 바라보는 중국’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7%가 중국을 세계 1위 경제대국으로 꼽았다. 하지만 군사력은 아직 미국이 중국보다 우위라고 대답했다. 군사·경제력으로 대변되는 하드파워에서는 물론 문화·예술 분야 영향력을 뜻하는 소프트파워에서도 아직은 미국이 중국을 크게 앞서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하드파워, 소프트파워 모두에서 미국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으며, 미국이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 온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물론, 심지어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하는 라틴아메리카에서까지 경제력과 능란한 외교술을 바탕으로 급속히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중국이 주도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과 함께 설립한 상하이협력기구(SCO)는 중앙아시아 군사거점을 중시하는 미국에 무시 못 할 견제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중국의 제안으로 2000년 합의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를 조성할 때에도 미국은 소외됐다. CMI는 아세안국가와 한국, 중국, 일본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할 경우 회원국 간의 통화 스와프를 통해 지역통화를 안정시키는 장치다. 미국은 자신이 제안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는 엄연한 회원국이지만 CMI에서는 배제됐다.

영국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에 따르면 1820년 구매력 기준 중국 GDP는 세계 전체의 33%로 유럽 전부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당시 미국 GDP는 중국에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랬던 중국이 아편전쟁 이래 100년간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면서 점차 힘이 약해졌다가 21세기 들어 다시 기운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1세기에 걸친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중국인들은 개혁·개방 이후 용(龍)이 하늘로 치솟듯 힘차게 굴기(崛起)해 왔다. 그 결과 이제는 미국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카네기국제평화연구소의 알베트 카이델 연구원은 “중국 GDP는 2035년 미국과 맞먹고 21세기 중반 미국의 두 배가 될 것이다…이에 대비해 미국은 글로벌 시각과 전략을 바꾸고 내부 체제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미 시각과 전략을 바꾸었으며 갈수록 중국에 대해 더 긴장하고 있다. 국제정치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글로벌 패권의 무게중심은 시시각각 조금씩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아주경제 송철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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