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의 트렌드브리핑] 법 위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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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2-0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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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법정 나들이를 해 봤다. 글감을 구하기 위해 가끔 찾는 곳이다. 정의와 불의가 수많은 현금과 함께 오고가는 현장. 듣도 보도 못한 인간 군상들이 상식 이하, 이해불가의 난장을 벌이는 아수라장. “진실이 밝혀졌다”, “정의는 살아 있다” 기뻐하는 자들은 정작 속내를 감추고 빨리 벗어나야 하는 곳.

서울고등법원의 한 항소심 재판정에 들어섰다. 잔기침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게 꼭 절간 같았다. 개정시간이 30분 쯤 지났는데 재판부는 안 보이고 쾌쾌한 냄새만 코에 스며들었다. ‘뭔가 끝까지 검토하는 복잡 미묘한 사건이 있는가 보군’. 진행 중인 다른 법정으로 옮길까, 생각하다 ‘거기서 거기겠지’ 싶어 주저앉았다. 지루한 기지개와 하품이 너댓 번 계속 될 무렵, 독일병정 같은 표정의 주심 판사와 배석 판사들이 입장했다.

피고인 머리 수가 많은 경제사건 하나가 속전속결 지나갔고, 갓 스무 살이나 될락말락 젊은 남자의 강간치상 건이 뒤를 이었다. 마침 항소심 판결이었다. 옳지, 대박이다. 가슴이 설레었다. 판사가 법정에서 낭독하는 판결문은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모와 시시비비가 다 들어 있다. 뭘 좀 아는 사람들이면 법정 바깥에서 벌어졌던 숱한 우여곡절의 실마리까지 감지할 수 있다. 인터넷 매니아 용어로 ‘므흣한’ 글감이 아닐 수 없다. 수첩을 꺼내들었다.

이 순간 재판장의 입술은 지상 최고의 권력이다. 원고 피고 등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가족, 이해관계인 전부의 운명이 그의 한마디에 갈리기 때문이다. 때로 인생이 이 자리에서 결판나는 수도 있다.

주심 판사가 입을 열어 마치 더듬거리듯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법정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자세히 묘사하진 않겠다) 재판의 정황을 먼저 요약하면 이렇다. A군과 ㄱ양은 새파란 나이의 커플이었다. ㄱ양은 순결을 잃었는데, ㄱ양 측에선 딸이 강간당했다고 주장했다. A군 측은 강제가 아니었다며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댔다. ㄱ양 측은 강간이 아니었다면 우울증에 자살시도 등을 할 리가 없다고 맞섰다. A군 측은 ‘ㄱ양 측의 주장이 뭔가 석연치 않다’며 계속 무죄를 주장했다. 유무죄 주장이 맞선 이 사건 판결문의 결론은 ‘유죄’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죽을 힘을 다한 저항이 없었다고 해서, 관계 후 데이트하는 듯 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강간이 아니라고 볼 수 없고, 하지만 가해자가 강간이 아니라고 오인할 수 있는 소지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강간치상은 유죄다. 0년의 실형에 처하되 0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신상정보를 5년간 인터넷에 공개한다’

어? 선뜻 이해가 안 갔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주장도 저 항변도 다 맞고 결론은 버킹검이라니. 이상했다. 관계자들을 만나고 싶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하게 마련이다. ‘아이구, 우리 애기 어떡해’ 하며 창백하게 얼어붙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 “판사님이 뭐래요? 우리 애기 오늘 나온데요? 언제요? 당장이요?” 얼이 빠진 듯 독백이 이어졌다. 법정을 빠져나와 분분했던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슬슬 걸음걸이 보조를 맞추며 물었다. “좀 이상하네요? 유죄 맞나요?”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흘끗, 한번 쳐다보더니 멀끔한 양복 차림새를 확인하곤 한숨을 후우 내쉬며 말했다. “타협했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그쪽 집안에서 너무 강경하게 나와서. 아주 기가 질리게 만들어요. 억울하지만 어떡해요. 우린 힘이 없는 걸. 집행유예도 다행이지” 이게 왠 소릴까? 타협이라니? 판결이 타협이라? 재판부가 들으면 ‘준엄한 법정을 모독했다’ 감치명령을 내릴 지 모를 망언이다.

게다가 신상정보가 5년 동안이나 인터넷에 공개되고 사회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줄 전과가 생기는 판인데, 타협이라니? 도대체 말이 안됐다. “아니, 억울하면 끝까지 가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세상 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나요? 보세요? 최후의 보루라는 재판도 이렇잖아요” 순간 어떤 질문으로 말꼬리를 더 이어야 할지 막막했다. “저기...그래도..”우물쭈물하는데 획 돌아서 가버렸다. 붙잡을 새도 없었고 그럴만한 명분도 없는 입장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받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꼴이 됐다.

집으로 돌아와 곰곰 되새겨 봤다. 로미오와 줄리엣 스토리가 21세기 우리나라 법정에서 저런 파국적 결말로 재탄생된 건가? 아니면 억지로 강간을 하고도 다시 칼 끝을 들이대고 데이트를 강요한 희대의 강간 사건인가? 참으로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이군. 믿기지 않아서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아마 법 위에 또 다른 법이라도 있나보다, 지레 짐작 얼버무려도 머리 속이 뒤숭숭할 뿐이었다. 그리고 진짜 ‘최후의 보루’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너무 궁금해졌다.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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