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계신 분들은 중국 대륙을 가로 누비며 일제와 싸우다 가문이 흩어져 몰락하고 후손, 친척은 연락되지 않아 1967년 광복군 동지회 주관으로 한 봉분에 같이 모시게 됐다.
1985년 8월 15일 국가보훈처에서 지금처럼 아담하게 단장하였으나 후손이 없는데다 국립묘지가 아니라 국립공원 관할에 있다 보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봉분 우측에 서있는 비석에는 살아 귀국한 광복군 동지가 새긴 시가 있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이었다. 순국하고도 못잊었을 조국이여! 꽃동산에 뼈나마 여기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안히 잠드시라."
8·15 행사일에는 담당 기관에서 나와 공식적으로 묘소에서 행사를 추진하지만 구정과 추석에 제례를 지내드려야 도리에 맞는다고 판단되어 뜻있고 객기도 있는 사내들이 모였다.
2005년에는 추석과 구정 직전 토요일에 등산할 때 각자 니크삭에 과일, 떡, 김밥, 막걸리 등을 분담해서 하산시 묘소에 집결한 후 간단히 제례를 지냈다. 물론 그 기회에 주변 환경정화도 했다. 조금 서운했든 것은 검은 띠를 두른 대형화환이 몇 달씩이나 방치되었다가 우리 일행이 가서야만 치우는 일이었다. 버는 사람 쓰는 사람 따로 있다고 청소도 그러했다.
조금씩 자발적 참여자가 많아지면서 2008년부터 그래도 조직력이 있는 서울흥사단 북부지회와 의정부 지회가 중심이 되어 지금까지 11차에 걸쳐 무후제(無後祭)를 지냈다.
지난 추석에는 강북문화원(정수인원장)과 풍덩문화예술학교(채수창 전경찰서장)에서 적극 참여함으로 성대하게 치루어졌고 국군TV에서 녹화도 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문화재 전수자 일행은 무속형식을 빌어 약식의 해원 살풀이 행사도 가졌다. 채수창 총경은 땀과 흙에 얼룩진 얼굴로 묘소에 잔디를 입히면서 근육 노동의 가치를 실감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사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투쟁하신 만큼 국립묘지보다도 당연히 먼저 모셔야 하는 광복군 묘소이지만 후손이 없음으로 제 때에 향응하지 못한다는 건 우리 사회의 부끄러움으로 여겨졌다.
이 묘소에 기록돼있는 열일곱 분 중에는 1943년 중국 태항산 전투에 희생된 분이 네 분인데 이러한 분들의 희생으로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살아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팔로군 사령부가 내외곽으로 일본군 40여만 명에 포위되어 도로는 전부 차단되어 전멸, 질식 직전에, 그때 주은래 등 중공 지도부는 항복을 망설이기까지 한 상태에서, 우리 광복군, 조선의용군들이 지게부대를 편성해서 게릴라식으로 식량, 소금, 실탄을 보급했기에 포위망에서 살아났다.
인팔 밀림 전투에서 역시 일본군에 포위당한 영국군 사단을 영국군 사단에 파견해 있든 광복군 요원이 돌파구와 포위망 틈새를 알아내어 사단 전체를 구해 내기도 했다.
또 대륙 전역에서 정보 활동하시다 체포된 대원 중에는 혀를 깨물어 자진하신 분들도 있었다.
이처럼 우리의 선열 수십여 만명이 희생되어 우리는 반쪽이나마 광복을 했고 중공은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종료 이후의 헤게모니 투쟁을 고려해서인지 일본군과의 교전 경험으로 그 막강했든 조선의용군의 상당수를 북한에 보내 6·25의 남침 주력이 되고는 결국 소멸되었고 남쪽의 청년 장년들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충성심과 호국정신으로 맞서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조국을 지켰다.
양측이 합쳐서 큰 힘을 내어야 할 단군의 후손들이 새조국건설에 젊음이 쓰여지지 못한 채 건국 첫 시작에 그렇게 희생되었으니 이 한스러움을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어야 할까?
만약 6·25 전쟁이 없었더라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은 물론 한민족은 세계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살고 있지 지금처럼 합쳐도 내수 시장 1억이 안되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민족진영의 군대와 사회주의 계열의 군대가 다 합쳐 항일 투쟁한 통일군이었다. 남북관계가 제대로 되면 북측에서 반드시 와서 참배해야 할 성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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