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장이란 단어가 있다. 한 분야에서 눈에 띄는 업적이나 족적을 남긴 장인에게 주어지는 명예이자, 존경과 경외의 표시다. 이 단어가 어울리는 인물이 누굴까. 길게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쉽게 떠오른다. 50년간 ‘영화’만을 위해 살아온 임권택 감독. 이름 석 자보다 ‘거장’으로 불리는 게 어쩌면 더 어울리고 당연하다.
임 감독님(기사 및 칼럼 등의 글에서 보통 공인에겐 존칭의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하겠다) 최근 자신의 101번째 연출작을 내놓았다. 팔순을 바라보는 감으로 세상에 대한 달관적 시선이 돋보이는 ‘달빛 길어올리기’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 개봉 뒤 여러 언론 매체는 앞 다퉈 극찬을 쏟아냈다. 기자 역시 거장의 심미안에 경외감을 표시했다. 50년 동안 100편의 영화를 만들어낸 장인의 솜씨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버르장머리 없는 짓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세월을 영화 하나에 쏟아부어온 거장 중의 거장이 내놓은 작품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코너의 원칙을 지켜보려 한다. 감히.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이번 영화에 대해 극찬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코너의 원칙인 생트집을 부리려 한다는 것은 일구이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세상에 일구이언이 어디 있는가. 영화도 예술의 한 분야다. 예술이란 시각적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서론이 길었다.
이번 영화는 한지에 대한 예찬이자 삶에 대한 반추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중심소재는 한지다. 하지만 그것이 왜 중요하고, 또 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문화유산인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주인공들의 소소한 일상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균열, 그리고 그 틈을 메우는 도구가 한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한지가 중요하다는 공허한 외침을 쏟아낸다. 과거 조상들이 그것을 만들고 지켜온 이유는 없다. 영화에서 필용(박중훈)의 아내 효경(예지원)은 제지공예가로 나온다. 그에게 종이를 가르쳐 준 인물이 바로 아버지였다. 명확한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분명 그렇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고향 마을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장면에선 기대감과는 달리 별다른 언급조차 없다. 영화적 건너뛰기 법칙인가 의아스럽다.
반면 영화는 줄기차게 필용이 주도하는 조선왕조복원실록 사업 내용에만 집착한다. 이 사업에 매달리는 필용과 이 과정에서 만난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 여기서 지원의 존재가 눈에 띈다. 한지란 다소 생경한 소재이자 영화와는 동떨어진 재료를 풀어내기 위해 거장은 다큐멘터리란 도구를 꺼내든다. 그리고 그 도구를 부릴 ‘장이’로 지원이란 캐릭터를 창조해 낸 듯 했다.
여기까지도 좋다. 영화 중간 중간 지원의 카메라를 통해 소개되는 한지 작품 소개 장면은 맥을 끊는 역할의 충실성을 너무나도 확실히 담당해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흡사 ‘달빛 길어올리기’란 영화가 아닌 한지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TV 프로그램은 아닐 지 헷갈릴 정도다. 이것까지도 참아 내겠다. 필자의 예술적 혜안이 심히 떨어진다고 자평하고 넘어가보자.
임 감독님이 연출한 서편제가 생각난다. 판소리를 소재로 유봉(김명곤), 송화(오정해), 동호(김규철)의 갈등 속에 우리 내 판소리의 필연적 주제인 한을 송화로 하여금 가슴 절절한 내용으로 풀어냈다. 관객들의 심금까지 울리며 한국영화 사상 첫 100만 관객 돌파란 이정표까지 세웠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어떤가. 필용의 외도로 반신불수가 된 효경의 마음 속 응어리와 공업용 펄프에 설자리가 좁아지는 한지의 존재감. 그리고 자신의 처지 비관을 승진으로 풀어내기 위해 한지에 집착하는 필용. 또한 그 집착의 언저리에서 나타난 지원의 존재. 이 같은 굴레를 거장은 단지 한지의 기록적 다큐에만 집착한 채 미학적 기준으로만 풀어냈다. 전주시청 소속 필용이란 캐릭터가 끌고 간 스토리의 전체적 맥락이 이유였을까. 제작 지원이 전주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란다. 태생적으로 전주와 한지를 홍보해야 하는 임무가 너무 컸다.
거장의 101번째 기념비적인 연출작. 경탄과 극찬이 쏟아지는 가운데 생트집을 잡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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