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강정숙 기자)“국제관계란 기본적으로 사람 관계죠. 나이스펄슨(nice person)이라는 기본 재료에 서로 간 주고받을 수 있는 양념이 제대로 쳐져야 그 관계가 지속되고 유지됩니다. 그게 바로 국제관계라고 생각해요.”
또랑또랑한 고성의 작은 목소리가 발랄하다. 글로벌 세상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깃든 일상이 얼마나 다이나믹하고 에너지 넘치는 시간인지 인터뷰 내내 그의 들뜬 목소리와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사공일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장이 ‘G20 정상회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했던 송경진(43·사진) 특별보좌관은 서울 G20 정상회의 서울선언의 공로자다. 사공 위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글로벌 네트워크와의 연결을 담당하고 있다.
베테랑들이 모인 G20 준비위에서 ‘활동 반경이 가장 넓고 타고난 기억력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은 그는 미국 캔자스주립대학(University of Kansas))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99년부터 국제기구에서 일했다.
2004년 민간전문가 영입 케이스로 재경부에 들어가 외신대변인을 지냈다. 2008년 사공 위원장이 경제특보일 때부터 그의 보좌관 역할을 했다.
지난 25일 외교통상부 청사 1층에 마련된 주요20개국(G20)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 내내 4월 초 미국 워싱턴 D.C에서 있을 월드뱅크(세계은행그룹) 총제와 사공일 위원장의 미팅건으로 몇 차례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자신의 멘토라고 말하는 사공 위원장이 그에게 일깨워준 국제관계의 정의인 사람, 곧 소통과 관계의 필연성을 그는 오늘도 재확인하고 있다.
“역사의 기록, 사실을 가감 없이 써야하는 백서작업은 사소한 약속과 장소 등 일일이 확인 작업을 걸쳐 완성되는 오래고 지루한 작업입니다.”
4월말 발간을 목표로 진행 중인 G20 백서작업은 그에게 있어 서울G20정상회의를 또 한 차례 치르는 것과 같은 수고다.
사진 백서 작업까지 자진한 그에게 일 욕심이 과한(?)것 아니냐거 물었다.
“제 무덤을 제가 판 거죠(웃음). 글로 쓰니까 양이 많더라고요. 2008년10월부터 현재까지 2년 6개월간의 전 과정을 국민들이 활자로 본다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어요. 비주얼한 게 있으면 더 좋겠단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2008년부터의 스토리를 사진으로만 기록하는 작업이 재미있기도 합니다.”
사공일 위원장의 평가가 좋다. 정말 잘 아는 사람이 보는 G20, 어떻게 봐야하냐는 질문에 그는 겸손한 미소를 짓는다.
“(위원장님의 말씀은)과찬이에요. 제가 운이 좋았죠. G20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함께할 수 있었어요. 역사의 현장을 봤다는 점에 자부심도 느꼈고 책임감도 느꼈죠. G20에 애착도 많이 갔습니다. G20이 왜 중요한지 매일 피부로,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G20의 구상은 필연이었다고 한다.
“1차 워싱턴, 2차 런던, 3차 피츠버그 회의가 끝날 때마다 세계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았죠. 하지만 회의 덕분에 시장이 안정됐다는 건 우리 경제와 기업들, 결국 개개인에까지 연쇄적으로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겠죠. 2008년 금융위기는 G20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어요.”
송경진 특보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한 비공식 오찬자리에서였다. 그 후 만날 때 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그에게서는 사람을 대할 때 마다 빼놓지 않는 남다른 에너지가 커뮤니케이션은 멀티디스플레이(다면적)한 학문이죠.느껴졌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전공했어요. 한국에선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면 저널리즘과 동등시 하는데 미국에선 별개의 학문이에요. 저널리즘은 굉장히 실용적 학문이고.”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국제기구에서 일했다. 국제기구에서의 경력이 궁금했다.
송 특보는 국제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단체에서의 생활이 지금의 그를 만들어준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 에 있었어요. 여성문제와 청년실업문제를 다루는 여성국장, 노동권 실장을 지냈어요.”
국제기구에서 나가던 그가 어느날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국제자유노련은 상당히 정치적인 국제기구예요. 거기서 일하다 보면 세계의 헤게모니, 정치·경제력의 판도 같은 걸 목격하게 되죠. 제가 일을 시작한 1999년은 국제정치와 국제무대의 힘의 균형에 많은 변동이 일어나던 때입니다. 중국이 급부상했죠. 국제 힘의균형(파워밸런스) 상에 있어서는 격동기. 변동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제정치, 외교에 관련된 국제기구들도 그 흐름을 많이 탔어요. 당시는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존재감이 없었던 셈이죠. ‘우리가 이렇게 약하구나’ 안타깝더라고요. 미약하지만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바로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여성 글로벌 리더인 그에게 한국 사회에서의 편견에 대해 물어봤다. 우리나라 조직사회가 외국과 차이가 많이 날것 이라고 생각했던 기자에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어려운 일이란 건 알지만 우리나라의 여성 사회 참여는 낮습니다. 요즘 많이 말하는‘공정 기회사회’, 분명 지향해야할 모토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명 그 기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조직의 결정권자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결정권자는 대부분이 남성이죠. 우리사회는 그런 면에서 개방하고 발전돼야 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해요.”
이는 외국도 마찬가지란 게 그의 설명이다.
“전통이 있고 역사가 있는 기관 일수록 결정권자 대부분이 남성인 경향이 두드러지져요. 물론 정도의 차이는 상당부분 존재하죠. 다만, 여성들 스스로도 조직원으로서 가치 있는 일을 생산하는 사람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같은 동일선상에 놓고 균형 있게 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것에는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과 의무가 따라야 한다는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국제관계’는 곧 ‘사람관계’라는 그와 그의 멘토인 사공일 위원장의 지론이 궁금했다.
“3년간 사공일 위원장을 모시면서 깜짝 놀랐어요. 위원장은 한국의 미약한 위상 탓에 국가적으로도 접촉이 쉽지 않은 각국의 키(key)가 되는 사람들과 굉장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어요. 서울G20회의를 하는데 처음부터 위원장의 덕을 많이 봤죠. ‘내가 뭘 부탁했을 때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나 역시 줄 수 있는 관계’. 위원장과 일을 하면서 오랜시간 쌓아온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국제관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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